'1588'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는 고객센터나 서비스센터 등 이른바 비즈니스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통념과 다르게 특별한 1588 전화가 있다.
바로 1588-9191이다. 이 번호를 누르면 사회복지법인 생명의전화 소속 상담사와 24시간 언제든 연결된다.
상담사들은 홀로 대응하기 어려운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이나, 이로 인해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1988년 자원봉사 상담자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37년째 위기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온 하상훈(65) 생명의전화 원장은 최근 펴낸 '목소리 너머 사람'(김영사)에서 수화기 너머에서 죽음을 생각하던 이들의 목숨을 구한 경험을 공유하고 생명 존중 사회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하 원장은 1976년 생명의전화 창립 후 110만건의 위기 상담통화가 이뤄졌다며 "수화기를 든 사람들은 99.9%의 확률로 자살로 생명을 잃지 않는다"고 책에서 전했다. 생명의전화는 내년 9월이면 40주년을 맞이한다.
26일 서울 성북구 소재 생명의전화 사무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한 하 원장은 전화 상담이 위기에 처한 이들의 자살을 막는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생명의전화에 연락하는 이들은) 죽고 싶은 심정으로 전화하지만 동시에 살고 싶은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양가감정이라고 합니다. 시소처럼 '살아야 할까 죽어야 할까'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죠."
그는 동시에 여러 가지 스트레스에 직면해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의 심리 상태는 부풀어 오른 풍선에 공기를 계속 넣는 것과 비슷하다며 이들의 이야기를 "비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경청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풍선에 공기가 계속 들어가면 결국 '빵' 터집니다. 근데 상담하는 분이 잘 들어주시는 가운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바람이 조금씩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죽고 싶은 마음이 정화됩니다.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하 원장은 자살 위기에 처한 이들의 마음이 정화되면 마음 깊은 곳에 원래 있었던 삶의 의지가 조금씩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상담자가 이런 변화를 응원하며 함께 대안을 모색하다 보면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커진다고 그는 전했다.
생명의전화에서는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약 200명이 상담봉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부, 학생, 종교인, 교수 등 직업도 다양하다.
상담봉사원으로 활동하려면 50시간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상담 이론, 정신 건강 이론, 성격 이론, 가족 문제를 비롯한 인간관계 상담법 등을 배우고 실습하고 전문가의 평가를 거쳐 비로소 정식으로 상담봉사원이 된다.
활동 시간은 상담봉사원 1인당 한 달에 주간 7시간 혹은 야간 10시간으로 정해놓았다.
하 원장은 이렇게 하는 것이 국제적인 표준에도 부합한다면서 "상담봉사원이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정신적으로 충분히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담봉사원 중에는 한때 자살을 생각하다 생명의전화에 연락해서 도움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는 정부가 자살예방기본계획을 세우거나 자살예방 사업을 하는 전문 기관을 설립하는 등 자살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목표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인터뷰에서 지적했다.
"비유하자면 강물에 빠져 떠내려오는 사람을 구조하려고 하류에서 온 힘을 다 기울이고 있는 셈이죠. 물론 그것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하나 필요한 일은 강 상류에서 (애초에) 물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회 구성원 누구든지 소속감을 지니고, 자긍심을 느끼며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서 애초에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하 원장은 이를 위해서는 생명 존중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자고 제안했다.
"저는 간단한 인사부터 시작하자고 이야기합니다. 국민운동이 전개되어야 자살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자살 위기에 처한 이들의 경고 신호나 위험 요인을 발견하고 전문가에게 연결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하 원장은 만약 "어제 잘 잤어" 혹은 "밥 맛있게 먹었어"라고 안부를 물은 적이 있다면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 것"이라고 책에 썼다. 일상에서 주고받는 짧은 대화나 곁에 있는 이들에 대한 작은 관심이 자살로 인한 죽음을 막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도움을 찾는 울음'(cry for help) 소리를 내기 마련인데 아무도 이들의 손을 잡아주지 않을 때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 하 원장의 견해다.
그는 자살한 사람의 가족 등(자살 유족)이 겪는 고통에 주목했다.
"그분들은 너무 큰 충격을 받습니다.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나 분노, 수치심, 사회적인 낙인이 찍히는 느낌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인 정서를 경험합니다."
장례를 비롯한 애도 의식은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자살 유족은 타인의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가족의 죽음을 드러내놓고 슬퍼하기 쉽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 장례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고인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자기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유족을 찾아갔더니 집에 유골함을 계속 보관하고 계셨습니다."
자살이 발생하면 고인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를 심리적으로 분석하는 이른바 '심리 부검'을 전문 기관이 실시하기도 한다. 자살 유족의 진술과 기록을 통해 자살사망자의 심리 행동 양상 및 변화를 확인해 자살 원인을 추정·검증하는 체계적인 조사가 심리 부검이다.
심리 부검은 자살 예방을 위해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자살 유족의 충격이 매우 크고, 이들이 가족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기 어렵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심리 부검을 활발하게 진행하기 어렵다고 한다.
하 원장은 자살자 1명이 발생하면 그 6배 해당하는 유족이 큰 충격을 받는다며 "자살 유족을 사회가 보듬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작년 우리나라에서 1만4천439명이 자살했습니다. 8만명이 넘는 이들이 심각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10년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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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