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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닷컴 이우주 기자]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라고 불릴 정도로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 늘 있었던 황석영. 황석영이 작가가 된 이유도 근현대사 안에 있었다.
황석영은 고등학교 1학년 때 4·19 혁명 현장 속에 있었다. 4·19 혁명은 황석영이 작가의 꿈을 처음 가지게 된 계기가 됐지만 황석영은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고. 황석영은 "학교가 청와대 앞에 있었다. 4교시 쯤에 총소리가 들려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다 집에 보냈다. 하교하다 군중에 휩싸였다"며 "경찰들이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쏘더라. 뛰어가다 보니 친구가 쓰러졌다. 넘어진 줄 알고 일으켰는데 관자놀이에 총을 맞아서 피가 쏟아지더라. 친구를 응급실 가는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갔는데 친구가 어디에도 없었다. 병원 뒷마당에 시신을 모아놓은 곳에 있었다"고 친구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목격했던 경험을 털어놨다.
이후 충격을 받은 후 황석영은 학교도 가지 않고 방황을 시작하며 결국 고3때 퇴학을 당했다. 이후 소설가의 꿈을 꾸며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황석영. 황석영의 어머니의 황석영에게 늘 책을 사주셨던 분이지만 소설가가 되는 것만큼은 크게 반대했다. 당시 작가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던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 황석영은 "어머니가 작가라는 건 제 팔자를 남에게 내주는 거라더라"라며 당시 어머니가 반대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에 황석영은 가출을 했고, 지방의 공사장을 떠돌다 우연히 절에 들어갔다. 절에 간 후 스님이 되겠다고 결심한 황석영은 8개월간 생활하다 어머니를 마주했다. "집에 가자"는 어머니의 말에 황석영은 절 생활을 정리하고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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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은 작품을 쓰기 위해 늘 그 배경에 가 취재를 하고 직접 생활까지 한다고. 농민 배경 책을 쓰기 위해 농민학교, 문화학교까지 운영했던 황석영은 1980년 5월 광주로 향했다. 하지만 황석영은 5·18 민주화운동 현장엔 없었다고. 황석영은 "소극장을 만들기 위한 출판 계약금을 받으려 서울에 갔다. 5월 17일에 신촌 술집에 있는데 한 젊은이가 날 보더니 큰일 났다고 하더라. 계엄령이 내려지고 사망자까지 생겼다더라"라고 떠올렸다. 광주로 돌아갈까 했지만 이미 신분이 알려져있던 황석영이 가기엔 너무 위험했다. 결국 황석영은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걸 하자"며 서울에 남아 광주의 실상을 기록하고 유인물을 배포하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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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넘어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곡이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작자 역시 황석영이었다. 황석영은 곡을 제작한 이유에 대해 "유족들끼리 만나야 뭘 이야기하고 할텐데 유족들을 못 모이게 했다. 근데 경조사는 됐다"며 시민군의 대변인과 '들불야학' 창립자의 영혼결혼식을 시키며 유족들을 처음으로 모이게 했다고 밝혔다. 유족들을 모이게 한 후 욕심이 생겼다며 '임을 위한 행진곡'까지 제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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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은 "나는 작가다. 광대는 그걸로 사는 것"이라며 "사회적 터부나 억압을 산산히 부수고 일상화시켜야 하는 게 작가라고 생각한다"고 작가로서의 소신을 밝혔다.
wjle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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