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정현석 기자] "2017년 첫 우승(삼천리투게더 오픈)을 했을 때, '20승만 하고 은퇴하겠다'고 다짐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달성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KLPGA 투어 역사의 새 페이지가 열린 날, 마이크를 잡은 '여제' 박민지(28·NH투자증권)의 얼굴에는 미소와 함께 만감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한국여자골프 역사상 단 3명 뿐인 20승 고지를 정복하며 '전설'의 반열에 오른 그는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감과 '모범'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박민지는 31일 경기도 양평 더스타휴 골프&리조트(파72)에서 열린 KLPGA 투어 'Sh수협은행 MBN 여자오픈' 최종 3라운드에서 보기 없이 버디만 8개를 몰아치는 신들린 플레이로 8언더파 64타를 작성했다. 최종합계 10언더파 206타를 기록한 박민지는 단독 2위 김지윤(9언더파 207타)을 1타 차로 제치고 짜릿한 역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지난 2024년 셀트리온 퀸즈 마스터즈에서 통산 19승을 거둔 이후 2년 만에 기록한 시즌 첫 승이자, 간절하게 기다렸던 통산 20승 고지. 이로써 박민지는 한국 여자 골프의 불멸의 레전드인 고(故) 구옥희와 신지애가 보유한 KLPGA 투어 역대 최다승 타이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선두에 5타 뒤진 공동 10위로 최종 라운드를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박민지의 우승을 점친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박민지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전반에만 3타를 줄인 뒤, 후반 16번 홀(파4) 버디로 선두 김지윤을 따라잡으며 공동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지막 18번 홀(파5)에서 4.7m 짜릿한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며 마침내 리더보드 최상단을 점령했다.
경기 후 중계방송 인터뷰에 나선 박민지는 대기록을 앞두고도 의외로 담담했던 심경을 전했다.
그는 "이상하게 긴장이 전혀 안 되더라. '왜 이렇게 긴장이 안 되지?' 싶을 정도였다. 16번 홀에서 내 위치가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캐디가 안 알려주더라. '아, 내 것만 치라는 소리구나' 생각하고, 여기 18번 홀 그린에 올 때까지 스코어보드를 전혀 보지 않았다"며 미소를 지었다.
단독 선두로 먼저 경기를 마친 뒤, 연습 그린에서 퍼트 연습을 하며 후발 주자들의 결과를 기다렸던 순간에 대해서는 오히려 편안하게 연장전을 준비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16번과 18번 홀 위치가 쉬운 편이라 당연히 연장전이 올 거라 생각하고 준비했다. '이 또한 우승을 향해 가는 길이다'라고 편안하게 마음 먹었다"고 설명했다.
신인 시절 품었던 '20승 은퇴'라는 꿈을 마침내 이뤄낸 박민지. 하지만 20승 달성으로 프로 입문 후 목표를 달성한 그의 시선은 벌써 내일을 향해 있었다.
"그동안 원하는 대로 공격적인 플레이를 잘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제 시드도 단단히 확보했으니 다시 하던 대로 시원하고 공격적인 골프를 보여드리겠다"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박민지가 20승이라는 위대한 역사 앞에서 강조한 것은 '모범이 되는 선수의 삶'이었다. 단순한 타이틀 홀더를 넘어 후배들과 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이정표가 되겠다는 다짐.
박민지는 "저보다 더 대단한 길을 걸어갈 후배들이 많을 것이다. 그 선수들이 더 멋진 길을 갈 수 있도록 제가 앞에서 열심히 달리고, 또 모범이 되는 선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응원을 보내준 팬들을 향한 인사를 건네는 박민지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고마움과 책임감이 묻어났다.
그는 "제가 평소 쉴 때나 골프장에 있을 때나 정말 많은 분이 응원해 주신다. '내가 이렇게까지 큰 사랑을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럴 때일수록 제가 서 있는 이 자리, 이 위치에서 정말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앞으로 행동 하나, 말 한마디도 정말 조심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2년의 긴 침묵을 깨고 KLPGA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연 박민지.
전설의 반열에 우뚝 선 여제의 시선은 가치 있는 방향을 향해 있다.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는 삶. 영원히 빛날 전설의 길이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
사진제공=KLPG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