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해진은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산다. 북한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동네다. 그는 수시로 산에 오른다. 산등성이 어딘가에서 등산객과 눈인사도 나누고, 때때로 멧돼지 가족도 만난다. 하지만 그의 산행은 정상을 향하지 않는다. 유유자적 가볍게 걸으며 숲의 평온함에 깃들 뿐이다.
영화 촬영차 지방에 머물 때 가장 먼저 하는 일도 숙소 인근의 산을 알아두는 일이다. '극비수사'를 찍을 땐 부산 금련산을 거의 날마다 찾았다. "외로울 때 의지가 되고, 스트레스도 풀리고, 건강까지 챙길 수 있다"며 '산 예찬론'을 펼친다.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에서도 만재도 파란지붕집 뒷산을 산책하는 유해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해진이 영화와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산을 오르는 그의 걸음과 꼭 닮았다. 정상을 탐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한다. 그러니 '오버 페이스'도 없다. 똑같은 산이라도 계절과 날씨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듯, 그의 영화와 연기도 늘 새롭다.
이번 영화 '극비수사'에서는 유해진의 진중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해적'이나 '타짜'에서의 감초 연기에 익숙한 관객에겐 조금은 낯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해진의 절제된 정극 연기는 잔잔한 울림을 안긴다.
'극비수사'는 1978년 부산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유괴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유해진은 진정한 도(道)의 가치를 추구하는 도사 김중산을 연기한다. '기도가 간절하면 하늘이 감응한다'고 믿으며 아이가 살아올 것이란 확신을 갖고 형사 공길용(김윤석)을 도와 아이를 찾는다. 김중산과 공길용 모두 실존인물이다. "김중산이 일반적인 도사의 모습이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 아이를 구하려는 사람이라 끌렸어요. 시나리오에 그 마음이 잘 녹아 있었죠. 실화라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그의 설명처럼 김중산의 겉모습은 도사와는 거리가 멀다. 직업만 도사일 뿐 평범한 아빠이자 가장이다. 유해진은 김중산에게서 자신의 아버지 모습을 발견했다. "김중산은 가난하지만 꼿꼿하고 소신이 있잖아요. 저희 아버지도 참 대쪽 같은 분이셨어요. 셔츠는 다 낡아서 깃도 해져 있지만 깔끔하게 다려 입으셨죠. 김중산의 외적인 모습을 연출할 때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떠올렸어요. 완성된 영화로 보니 김중산이 더더욱 저희 아버지처럼 보이더군요."
유해진은 김중산이 지닌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영화에 많이 녹여내려고 했다. 도사여서가 아니라 아이를 둔 아버지라서, 김중산이 아이를 찾고자 하는 간절함은 더욱 힘을 얻는다. 특히 사건이 해결된 후 김중산네 가족이 모기장 안에 뒤엉켜 잠을 자는 장면은 눈물겹게 살갑고 포근하다. "아역들이 잘 때까지 기다려 찍은 장면이에요. 그중 한 녀석이 잠을 안 자고 울어서 결국 재촬영을 했죠. 제가 굳이 재촬영을 고집했어요. 부족하지만 한 울타리 안에서 정겹게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도 고만한 또래 아이가 있을 나이라서 그런지 아버지의 감정이 어색하진 않더군요. 저런 예쁜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죠.(웃음)"
유해진은 '극비수사'에 대해 "덧칠하지 않고 색을 덜 쓴 작품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더하기가 아닌 빼기에 집중한 작품"이라고도 말했다. 영화에서처럼 그의 연기도, 삶도, 생각도 점점 단순해지고 담백해진다. "그동안 작품을 통해 보여드린 모습들은 모두 제 안의 어딘가에 있는 것들이에요. 거기엔 '해적'에서의 유쾌한 모습도 분명 있겠죠.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김중산 도사 같은 모습이 스멀스멀 나오는 것 같아요. 실제로도 참 단순하게 살고 있어요. 등산, 여행, 영화…. 평소 관심사도 이런 것들이죠."
산에 오르며 그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들은 뭘까.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혼자만 잘 살아도 되는 걸까…. 어차피 정답이 있는 고민은 아니에요. 한편으로는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참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결국 그의 고민은 사람답게 사는 길(道)에 대한 것이리라. 영화를 고를 때도 그는 '사람'을 중심에 둔다고 했다. "모든 드라마는 결국 사람 얘기잖아요. 작품에 사람이 잘 묻어 있으냐가 가장 중요하죠."
인터뷰를 마친 뒤 유해진은 인터뷰 장소였던 삼청동 카페의 테라스로 나가 잠시 선선한 바람을 즐겼다. 그의 눈길이 지척의 북한산을 향했다. 그 모습이 산에서 득도한 도사님처럼 보였다.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