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전영지 기자]"팀이 K리그2로 강등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 데 대해, 구단 운영의 책임자였던 단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통감합니다.
'낭만 리더' 최순호 수원FC 단장이 강등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전격 사임했다.
최 단장은 지난 24일 수원시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 사퇴 의사를 전했다. 내년 말까지 수원 단장 임기가 남아 있지만 잔여임기와 관계없이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26일 오전 사무국을 찾아 작별인사를 건넸고, 마지막으로 사무국에 들른 김은중 감독과도 인사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오후 수원 구단이 최순호 단장의 사임을 공식발표했다. 구단을 통해 발표한 고별사에서 최 단장은 "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어떤 표현으로 이 아픔을 전해야 할지, 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 팀이 K리그2로 강등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 데 대해, 구단 운영의 책임자였던 단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통감합니다"면서 "한 시즌 내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보내주신 팬 여러분의 응원과 사랑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목소리를 높여 주신 팬 여러분의 모습은 언제나 저에게 큰 힘이었고, 동시에 반드시 보답해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그 믿음에 합당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이렇게 고개를 숙이게 된 점이 무엇보다 가슴 아픕니다. 저는 오늘부로 수원FC 단장직에서 물러나며,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라며 사의를 직접 전했다.
'대한민국 축구 레전드' 최 단장은 재단법인 수원FC 이사회의 공모를 통해 2023년 2월 수원FC 행정의 수장이 됐다.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공격수, K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에 빛나는 레전드 최 단장은 선수 은퇴 후 포항스틸러스, 현대미포조선, 강원FC 감독을 역임했고, 포항 감독 시절인 2003년 K리그 최초로 클럽 유스 시스템을 도입하며 지도자, 행정가로서의 혜안을 일찌감치 입증했다. 축구를 통한 나눔에도 적극 나서며 K리그 문화를 바꾸는 데 또렷한 족적을 남겼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FC서울 미래기획단 단장,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포항스틸러스 기술이사를 거쳐 '시민구단' 수원 단장직을 맡은 후에도 축구 선배로서 '기본'은 한결같았다. 지역 사회, 서포터스와의 적극 소통, 시민 주주 후원회원 유치, 수원 로컬 후원사 '캐슬클럽' 유치를 통해 새로운 시민구단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분투해왔다.
지자체 예산에만 의존하는 소위'지자체 구단'이 아닌 수원 시민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시민 구단'을 만들기 위해 4년 임기 내 1만명 후원회원 유치를 목표삼았다. 월 1만원을 내는 시티즌클럽, 월 5만~10만원을 내는 비즈니스클럽, 100만원 이상을 일시불로 내는 밀리언클럽 회원 모집에 적극 나섰고, 최 단장 본인이 솔선수범했다. 수원 중소 상공인이 후원사가 되는 캐슬클럽도 21호점까지 문을 열었다. '수원 시민이 직접 키우는 선수' 정책에도 진심이었다. 양동현 코치가 이끄는 B팀 훈련장, 경기장을 매주 찾아 '흙속의 진주찾기' 지역 인재 발굴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K리그에서 유일하게 남녀팀을 보유한 구단으로서, 여자축구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2026 시즌, 아시아여자챔피언스리그 8강에 오른 박길영호의 본선 선전을 위해 지소연, 김혜리, 최유리 등 '국대 에이스' 폭풍영입도 결정했다. 이 밖에 클럽하우스 건립, 훈련 환경 개선 등 수많은 꿈과 계획을 뒤로 한 채 2025년 겨울, 갑작스러운 이별을 마주하게 됐다.
참으로 다사다난한 3년이었다. 2023년 부임 첫해 승강 플레이오프는 '해피엔딩'이었다. 부산 아이파크에 짜릿한 역전드라마를 쓰며 잔류에 성공했다. 2024년, 두 번째 해는 시즌 내내 행복했다. 김은중 감독이 부임한 남자팀은 상위 스플릿 진출과 함께 '구단 역대 최고 순위 타이' 리그 5위에 올랐고, 박길영 감독의 여자팀은 14년 만에 WK리그 챔피언에 등극, 화성행궁 첫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최 단장은 지난해 말 김은중, 박길영 감독과 동시 재계약을 발표한 후 감독들에 대한 절대 믿음을 수시로 표했다. 그 무렵 세간에 김은중 감독과의 출처미상 불화설이 떠돌 때도 최 단장은 염화시중의 미소로 웃어 넘겼다. "감독을 지원하는 건 단장과 사무국의 당연한 역할이다. 그런 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아니니 신경 안쓴다.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라. 내가 선임한 감독이고 미래가 기대되는 좋은 감독이다. 나는 감독을 한결같이 믿고 간다. 선수단 관련해선 모든 걸 감독에게 맡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맞은 2025년 세 번째 해, 2년 만에 다시 맞닥뜨린 승강 플레이오프는 뜻밖에 '새드엔딩'이 됐다. 구단의 명운을 결정 짓는 빅매치에서 '플레이오프의 강자' 수원FC는 시즌 최악의 모습으로 기세등등한 부천FC에게 2연패하며 무너졌다. 어느 팀을 만나도 물러서지 않는 끈끈한 경기력으로 승부했고, 위기의 순간에도 틀림없이 해법을 찾아냈던 수원FC답지 않은, 귀신에 홀린 것만 같은 플레이오프 2연전이었다. 지난 여름 윌리안, 안현범 영입 후 반등에 성공했고, 김은중 감독의 준비된 수원이 강등될 일 없다고 믿었던 '백전노장' 최 단장도 예상치 못한, 이해하기 힘든 승부였다. 강등 확정 직후 홈 팬들의 야유와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서포터스 포트리스 앞에 선 최 단장은 "참 익숙하지 않은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왔습니다.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고 눈이 올 때도 여러분은 늘 우리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단장으로서 책임감을 무겁게 느낍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여러분의 응원,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인사가 수원 팬들을 향한 마지막 이별사가 됐다. 수원FC 재단 이사진이 전원 사퇴를 결정한 후 김은중 감독이 계약해지에 합의했고, 이보다 앞서 '구단의 어른' 최 단장이 용단을 내렸다.
강등 직후 최 단장은 지난 9일 경기일보에 기고한 '천자춘추'를 통해 "(수원FC 단장)데뷔 첫해 수원FC가 K리그1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러 오히려 흥분된 마음으로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2주 일찍 끝난 우승팀 세리머니보다 훨씬 더 즐겁고, 신나고 행복했다. 올해 역시 같은 시간을 보냈고 감독과 선수단을 믿음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선수단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경기력으로 6년 만에 다시 K리그2로 내려가게 됐다. 단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이때 이미 이별을 직감했다.
2023년 단장 취임사 때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를, 올해 후배 김주성을 향한 'K리그 명예의 전당' 헌사에서 나태주 시인의 '풀꽃2'를 낭송했던 최 단장은 사의를 표명한 후 SNS에 엘런 긴즈버그의 시 '어떤 것들'을 올렸다. '한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 네가 그것들을 떠나 보낸다 해도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너에게 돌아온다. 그것들은 너 자신의 일부가 된다.'
임기 4년차 구상을 미처 실행할 틈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이별이 아쉽지만, '낭만단장'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3년간 함께 달려온 수원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떠나는 사람이 말이 길면 안된다"며 짧은 고별사를 남기고 표표히 사무국을 떠났다.
수원FC 구단은 "구단 운영 전반을 다시 점검하고, 보다 안정적인 구조 속에서 팀이 나아갈 방향을 재정립해 나갈 계획이며 수원특례시와 긴밀히 소통해 후임 단장 선임을 포함한 절차를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2025-12-26 14: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