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스가 달랐다."
윤덕여 감독이 이끄는 한국여자축구대표팀(FIFA랭킹 18위)은 22일 오전 5시(한국시각) 캐나다 몬트리올올림픽스타디움에서 펼쳐진 국제축구연맹(FIFA) 캐나다여자월드컵 프랑스(FIFA랭킹 3위)와의 16강전에서 0대3으로 패했다. 초반 공세를 예상했고, 대비했지만, 전반 8분만에 2골을 내줬다. 가공할 스피드와 눈부신 패스워크에 기가 질렸다. 벤치에서 이를 지켜보던 지소연은 "2대1 패스 주고받으면서 순식간에 수비를 허물고 박스를 뚫고 들어와서 슈팅까지 날리는데… 그걸 어떻게 막아요"라며 허탈해 했다. 태극낭자들이 200% 투혼을 다했지만 체력, 스피드, 개인기에서 월등하게 앞서는 프랑스와 대등한 경기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골키퍼 김정미와 수비진의 투혼과 헌신이 없었다면 더 많은 실점도 가능했던 경기였다. 경기 후 선수들은 클래스의 차이를 겸허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12년전인 2003년 한국과 함께 미국여자월드컵에 첫 출전했다. '월드컵 동기'다. 첫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한국은 프랑스에 0대1로 졌다. 이것이 프랑스의 월드컵 첫승이다. 그후 12년, 양국의 차이는 현격하다. 무엇이 차이를 만든 것일까. 월드컵 본선은 진검승부다. 정신력이나 운, 요행이 아닌 실력을 겨루는 무대다. 사상 첫 16강의 꿈을 이룬 대한민국 여자축구에 프랑스전은 뼈아픈 교훈이었다.
▶장기적 시스템과 폭넓은 선수층이 필요하다.
프랑스는 2011년 독일여자월드컵 4강, 2012년 런던올림픽 4강에 이어 캐나다여자월드컵 유럽지역 예선에서 10전승했다. 10경기에서 54득점, 3실점했다. 저절로 된 일이 아니다. 2011년 독일월드컵 4강 이후 프랑스의 변화가 시작됐다. 여자축구에 대한 미디어의 폭발적인 관심은 기폭제가 됐다. 대중의 관심과 참여도 증폭됐다. 2011년 프랑스축구협회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았다. 여자축구 발전을 위한 4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노엘 르 그라에 프랑스축구협회장은 여자축구 발전을 "협회의 최우선 과제"로 선포했다. 회장의 확고한 의지는 확실한 결과로 이어졌다. 국가대표 출신 브리지트 앙리케를 책임자로 임명하고, '축구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화할 것, 직업 축구선수들이 벤치마킹하는 국가가 될 것, 국제대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것, 여자축구 훈련방법을 혁신할 것' 등 4가지 목표를 명시했다. 협회의 노력과 국민적 관심에 힘입어 2011년 5만4482명이었던 등록선수 수는 2015년 8만3000명으로 폭증했다. 2019년 여자월드컵 유치를 놓고 한국과 경쟁했지만, 준비과정, 인프라 자체가 달랐던 셈이다. 프랑스가 개최권을 따냈다.
한국 역시 골든타임이 있었다. 2010년 17세 이하 여자월드컵 우승, 2010년 20세 이하 여자월드컵 3위, 혁혁한 성적을 올린 직후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이 쏟아졌다. 지소연, 여민지 등 스타가 탄생했고, 여자축구 지원책도 발표됐다. 그러나 '반짝'하고 끝났다.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정체됐다. 여자축구 팬들은 "성적이 나면 청와대 한번 다녀오면 그뿐"이라는 자조섞인 해석을 내놓는다. 대한축구협회가 밝힌 2014년 12월 기준 대한민국 여자축구 등록선수는 76팀 1785명이다. 일본은 1409팀 3만243명, 독일은 5782팀 26만2220명이다. 단순 산술로 1785명 중 선발된 23명의 대표선수가 16강에 올랐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다. 선수층이 엷다 보니 특히 수비라인에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세계적인 선수들을 상대로 체력적, 기술적으로 버텨줄 수 있는 수비자원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12년만에 두번째 월드컵에 나선 '맏언니' 김정미(현대제철)의 뒤를 이을 골키퍼 자원의 발굴도 시급하다.
▶A매치가 필요하다
지난 4월 캐나다여자월드컵을 앞두고 러시아와의 A매치 2연전이 열렸다. 17년만의 안방 A매치였다. 선수들은 국내에서 A매치가 열린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했다. 그러나 월드컵을 앞두고 더 많은 유럽팀, 강팀들과의 A매치를 통해 경쟁력을 키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월드컵 무대에서 한국의 경험 부족은 눈에 띄었다. 매경기 처음 겪는 상황이 많았다. 조별리그 1차전 브라질전 라인 조율, 2차전 코스타리카전에서의 막판 실점, 16강 프랑스전에서의 초반 실점까지 위기의 순간을 슬기롭게 넘기지 못했다. 경험 있는 베테랑, 그라운드 리더의 부재가 아쉬웠다.
이날 프랑스의 엔트리 중 로르 조르주(162경기 6골), 르소메르(108경기 47골), 아빌리(149경기 29골), 토미스(119경기31골), 네시브(128경기32골) 가에탄 티니(125경기55골)등 무려 6명이 A매치 100경기 이상을 뛴 백전노장이었다. 한국 여자축구에는 '100경기 기록'이 전무하다. 10년을 넘게 뛰어도 100경기를 채우기 어렵다. '중사' 권하늘이 이날 16강전을 포함, 98경기로 최다경기를 기록중이다. 18세때인 2006년 11월30일 데뷔전을 치르고 10년이 흘렀건만 아직 100경기를 채우지 못했다. 이날 선발로 출전한 이금민은 A매치 8경기, 강유미는 A매치 6경기 출전에 불과했다. 투자없는 승리는 없다. 경험의 차이는 실력의 차이가 됐다.
▶리그 활성화가 필요하다
프랑스 대표팀의 힘은 자국 리그의 힘에서 나온다. 프랑스 여자 디비전1은 유럽축구연맹(UEFA) 여자리그 랭킹 2위다. 독일 분데스리가와 쌍벽을 이룬다. 지소연(첼시 레이디스)이 활약하고 있는 잉글랜드 여자프리미어리그보다 리그 랭킹에서 3계단이나 높다. 매시즌 유럽 여자챔피언스리그에서도 프랑스세는 거세다. 2009~2010시즌 이후 프랑스 구단은 우승 2번, 준우승 3번을 차지했다. 중심에는 올림피크 리옹이 있다. 리옹은 유럽 여자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준우승 2회를 차지했다. 올림피크 리옹은 지난 시즌 22경기에서 147득점 6실점했다. 프랑스 대표팀 23명의 엔트리 가운데 르소메, 로르 델리 등 무려 10명이 리옹 선수다. 7명은 파리생제르맹에서 뛴다. 리그에서 맹활약한 선수들은 월드컵 무대에서도 빛났다. 팀에서 147골을 합작한 선수들의 완벽한 호흡과 자신감은 세계 무대에 그대로 이어졌다. 지소연은 "지금 프랑스 여자축구, 프랑스리그는 최고의 황금기"라고 했다. 내로라하는 에이스들이 프랑스에서 뛰길 원한다. 프랑스전은 '우물안 개구리' 한국 여자축구의 현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으론 프랑스가 4년전 그러했듯, 사상 첫 16강의 새 역사를 발판으로 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지속적인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투자하고 노력한다면 4년후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계기도 됐다. 몬트리올(캐나다)=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