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래터는 매우 영리하다. 5개 국어에 능통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영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료들을 존중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아주 큰 문제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겸 국제축구연맹(FIFA) 명예 부회장이 평가한 제프 블래터 FIFA 회장이다.
블래터 회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보가 심상찮다. 1981년부터 1998년까지 17년간 FIFA 사무총장을 지낸 그는 1998년부터 현재까지 회장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물론 최근 입지는 '시한부 회장'이다. 월드컵 유치 과정에서 추잡한 비리 스캔들이 자신의 턱밑까지 도달하자 사퇴를 결정했고, 내년 2월 26일 새로운 FIFA 회장이 선출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있다. 또 다시 '마각'을 드러내고 있다. 40년 가까이 FIFA를 좌지우지 한 권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 춤을 추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정적들이 있었다. 하지만 반기를 드는 순간 사라졌다. 블래터 회장과 함께 초기에 호흡을 맞춘 미셸 장 루피넨 전 FIFA 사무총장을 필두로 레나트 요한슨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 모하메드 빈 함맘 아시아축구연맹(AFC) 회장 등이 차례로 국제 축구계에서 사라졌다. 오랫동안 블래터 회장의 반대편에 섰던 정몽준 회장도 2011년 FIFA 5선 도전에 실패했다. 반대파 숙청에 추호의 관용도 없었다.
블래터 회장의 칼날이 차기 FIFA 회장에 도전장을 낸 정 회장과 미셸 플라티니 UEFA 회장에게 향하고 있다. '흠집내기'는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고, 경고음도 요란하다.
정 회장에게는 FIFA 윤리위원회 조사 카드를 꺼내들었다. FIFA 윤리위가 최근 정 회장이 2010년 홍수가 난 파키스탄에 40만달러(약 4억7000만원), 대지진이 발생한 아이티에는 50만달러(약 5억9000만원)를 기부한 것을 조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갔다. 2022년 월드컵 개최지 결정을 앞두고 한국유치위원회가 발표한 7억7700만달러 규모의 세계축구기금 조성 계획과 이후 이를 설명한 편지와 관련해서도 정 회장을 조사한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다.
정 회장도 발끈했다. 22일 입장을 발표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정 회장 측은 "일부 보도는 과거 FIFA 선거때마다 공작을 해온 블래터 회장이 이번 차기 회장선거에도 적극 개입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기금 조성 계획은 모든 신청국에게 요구됐던 '축구 발전' 기여 항목의 일부였으며, 일부 국가는 한국보다 훨씬 더 야심찬 계획을 제출했었다. 이 사안은 2010년 11월 이미 제롬 발케 FIFA 사무총장이 당시 정 회장과 한승주 한국 유치위원장에게 서한을 보내 윤리위에 회부하지 않겠다면서 종결되었다고 통지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블래터 회장의 즉각적인 사퇴도 다시 요구했다. 정 회장 측은 "FIFA가 최근 플라티니 UEFA 회장에 대한 음해에 이어 정 회장에 대해서도 음해 공작을 하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블래터 회장은 더 이상 선거에 개입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즉각 물러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FIFA가 이처럼 타락한 행위를 계속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마피아보다 더 타락한 조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임을 잘 깨닫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블래터 회장은 플라티니 회장을 향해서도 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최근 "플라티니와 나의 관계가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같은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배신감을 느낀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플라티니가 변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날선 신경전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23일 플라티니 회장이 지휘하고 있는 UEFA를 향해 "과거 몇년간 FIFA에서 일어난 일의 핵심은 어느 한 대륙연맹이 다른 연맹들을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를 볼 수 없었다"며 견제했다. 외신들은 블래터 회장이 겨눈 화살은 1990년대 중반 UEFA가 내놓은 FIFA 개혁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플라티니 회장의 FIFA 장악을 반대하는 목소리다.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FIFA 회장 선거까지는 6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블래터 회장은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이다. 반격이 시작됐다. 차기 회장 선거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