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최보란 기자]영원한 '파리의 연인'이며 '루루공주' 일 것 같던 배우 김정은(42)이 '밥집 아줌마'로 안방극장에 돌아왔다. MBC 주말극 '여자를 울려'의 주인공 정덕인 역할로 3년만에 안방극장에 컴백한 김정은은 파란만장한 여인의 삶을 펼쳐내며 40부작을 이끌었다.
톡톡 튀는 매력에 밝은 이미지, 코믹하고 러블리한 캐릭터는 김정은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오랜만에 시청자 앞에 선 김정은은 이것들을 과감히 내려 놓았다. 과거의 그 어떤 모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연기 인생 20년 김정은에게서 여전히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시간이다. 김정은은 그것이 "더하기가 아닌, 가진 것을 버리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모르는 나를 꺼내주길 갈망한다. 스스로 색깔을 단정지으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올 것도 없고, 스스로 한계를 지어버리면 발전이 없다. 그저 20년간 해 온 것을 답습하는 것 밖에 없을 것 같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내 안에서 새로운 것을 꺼낼 게 없다고 느꼈다. 이제는 오히려 가진 것을 버려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작품은 많이 버리려고 애썼고, 마음을 많이 열려고 노력했다. 그것을 왜 좀 더 빨리 못했을까 싶다. 이제라도 해서 다행이다."
덕인의 삶은 참으로 극적이다. 하나 뿐인 아들을 학교 폭력으로 잃은 뒤 망연자실한 그녀는 형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아들이 다니던 학교 앞에 밥집을 차렸다. 그런 덕인을 이해하고 보듬어 줄 사람은 곁에 없다. 친모는 과거 그녀를 버렸고, 남편마저 외도로 상처를 더했다. 새로운 사랑 진우(송창의)가 찾아오지만, 알고보니 그는 덕인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당사자의 아버지다. 설정만 봐도 덕인이라는 인물을 연기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심정이라는 게, 계산이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얼마나 화를 내고 울분을 토해야하는지, 그 정도를 알 수 없었다. 매 순간이 숙제였다. 발가벗겨진 기분조차 들었다. 연기를 1~2년 한 것도 아닌데, 신인이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무대에 던져진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외롭고 무섭고, 론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한 순간 용기를 내서 정말 정신줄을 놓고 연기를 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스태프들이 울고 있더라. 그때 '이렇게 해도 괜찮구나' 하고 용기를 얻었다. 레디, 액션 그 사이에 '자식을 떠난 보낸 엄마다'라고 수없이 되새기고 연기에 들어갔다. 전쟁터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 고민이 얼마나 깊었는지, 김정은은 "힘든신을 앞두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차라리 촬영을 못하게 돼서 내일 찍으면 안되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김정은 또한 덕인이라는 캐릭터가 만만치 않음을 모르지 않았을 터. 그럼에도 덕인이라는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여성이 주체적으로 끌고 가는 드라마가 흔치 않다. 보통은 남자가 문제를 해결하고 여자는 갈등을 해결하는 요소로만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다보니 갈등을 위한 갈등을 만들 수밖에 없고, 민폐 캐릭터가 될 수밖에 없지. 이번 작품은 여자로 인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오히려 여자가 주축이 돼 나쁜 사람을 물리치고 남자를 구해준다. 그런 덕인이라는 캐릭터가 굉장한 매력이었다. 아이가 있었고, 아픔이 있고. 그런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모든 일을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여성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 매료돼 겁없이 뛰어들었다.
'로코의 여왕'이었던 김정은의 변신은 놀라웠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덕인 역할에 몸을 던진 그녀의 연기는 더욱 놀라웠다.
"정말 많이 버리려고 노력했다. 20년간 쌓아온 것을 지키는 것보다는 버리는게 더 힘들었다. 누구와 같이 일하느냐도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이번 작품은 정말 감독님을 비롯해 제작진 모두에게 많이 기댔다. 무엇보다 솔직한 것 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솔직히 힘들었다. 20년 연기 했다고 새로운 역할이 쉽게 되는 게 아니다. 끔찍하고 괴롭고 아무 생각 없을 때도 있다. 마치 잘 아는 것 마냥 앉아있으면 다른 사람은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실직고하고 모르는 게 같으면 빨리 얘기하고 손을 내밀었다. 솔직하게 다가가려고 노력을 하니까 수용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졌고, 마음을 열고 나니까 두려울 것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딜레마는 있었다. 김정은 또한 대중에게 익숙한 자신의 모습을 버리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시청자들이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반대로 예전과 비슷한 연기를 했을 때 지겨워하지는 않을지. 여배우의 시간은 흘러가고, 변한 자신을 대중이 온전히 사랑해 줄지에 대해서도 물음표였다. 새로움과 익숙함 사이에서 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김정은에 기대하는 부분이 있는데, 예전에 더 예뻤던 배우가 갑자기 아줌마가 돼 나오는 것을 어떻게 보실지 걱정도 됐다. 혹은 예전처럼 방방 뛰면서 포문을 열었는데 '지겨워'이러면? '시청자들이 기대했던 거랑 다르면 어쩌지? 옛날이랑 똑같이 했는데, 이젠 지겨워 하면 어쩌지?' 그런 딜레마가 여배우라면 누구나 있을 것 같다."
김정은은 "'여자를 울려'를 선택하면서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첫 회에 형사 출신인 덕인이 소매치기도 잡고, 식당 주인이니까 밥도 하고 하면서 덕인이라는 캐릭터를 소개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 장면을 앞두고도 고민이 많았다. '소리만 요란했지 별거 없었어' 그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라고 드라마 시작 당시 안고 있던 고민을 털어놨다. 그런 고민과 두려움 끝에 김정은이 발견한 해답은 결국 '진심'이었다.
"신기하게도 시청자들은 공들이고 열심히 한 만큼 알아봐 주시더라. 액션도 '했다치고' 이렇게 가는거랑 세심하게 한 번 더 고민해서 연기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한 장면 한 장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열심히 했을 때 좋은 반응이 나오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하는 드라마로는 정말 좋은 작품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김정은은 이번 작품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쌓아온 이미지를 과감히 내려놓은 결단력, 시청자들을 믿고 정면으로 부딪힌 그 열정이야말로 진정한 용기가 아니었을까. 진심을 다하는 연기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김정은이기에, 앞으로 또 어떤 모습과 색깔로 다가올지라도 믿고 보게 될 것 같다.
"제 또래의 여배우들이 작품 선택이나 자세에 있어서 딜레마가 늘 있다. 업그레이드 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금방 실망할까봐 부담감도 있다. 저도 한 동안 쉬었다가 온 데다, 특히 이번 작품은 전면으로 부딪히는 신도 많아서 부담도 컸다. 마치 '한 번 연기해 봐' 하고 지켜보는 기분도 있었다. '잘 할 수 있을까', '공감하실까'란 생각에 무섭기도 했는데, 결국 솔직하게 다가간 것이 통했던 것 같다. 여배우로서 용기를 참 많이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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