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김표향 기자] "인생사 새옹지마야." 영화 '사도'에 대한 호평을 전해듣던 이준익 감독이 손사래를 쳤다. "들떴다가 또 뒤통수 맞을 수도 있어." 괜한 엄살과 함께 '껄껄껄' 호탕한 웃음이 이어진다. "나이 들면서 돌아보니, 지나간 상처와 부끄러움들이 인생에 큰 약이 된 것 같아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더라고. 그래서 영화를 찍는 게 점점 무서워져요. 아무렴, 영화를 찍는다는 건 아주 무서운 일이야."
거장은 겸허했다. 환호에 귀기울이는 대신 과거의 실패들을 먼저 돌아봤다. 조금은 아쉬웠던, 그래서 아픈 손가락처럼 내내 마음이 쓰이는 몇몇 작품들. 상업영화 은퇴설까지 겪었던 이준익 감독은 대하 드라마 같았던 시간의 강물을 건너오며 영화를 대하는 자세가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사도'를 찍을 땐 마음가짐이 남다르더라고. 두렵기도 하고. 픽션이 아니니까. 이 영화의 90%가 실화예요. 역사는 공동의 재산이니, 더더욱 자세가 중요했지요. 역사에 불손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실력이나 의지보다 우선했던 현장이라고 자부해요. 감독, 배우, 스태프 모두가 같은 뜻이었지. 그래서 허투로 다루거나 함부로 찍은 장면이 하나도 없어요. 정말 최선을 다했어."
이준익 감독의 변화는 '사도'라는 명작을 잉태했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 이미 수차례 다뤄진 역사적 사건이지만, 새로운 작법으로 풀어낸 '사도'의 이야기는 또 다른 생명력을 갖고 관객에게 다가온다. 영화 속 영조의 대사처럼 사도세자 사건을 "나랏일이 아닌 집안일"로 접근한 이준익 감독은 "정치적 함수관계로 영조와 사도의 관계를 풀어야 한다면 이 영화를 찍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사도에 대해 권력싸움의 희생양이라고도 하고, 반대로 그냥 미치광이일 뿐이라고도 하죠. 학계에서도 양립된 논리가 있어요. 저는 사도라는 인물을 온전하게 표현하기 위해 영조에서 사도와 정조로 이어지는 56년간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시간의 흐름과 주변과의 관계성 안에서 한 인물을 살펴봐야 그의 입체성이 드러나거든. 아들로서의 사도, 아버지로서의 사도, 남편으로서의 사도는 모두 다른 인물이에요. 그래서 꼭 아들 정조의 이야기가 필요했어요. 56년간의 회한을 품어낼 수 있는 인물은 정조밖에 없거든. 그러니 정조가 해원(解寃)의 춤을 추는 장면이 이 영화의 마지막이어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이 영화를 찍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결국, '사도'가 전하는 메시지는 화해와 용서, 비극을 통한 자기정화로 모아진다. 가치관이 충돌하고 다층화된 갈등이 팽배한 시대, 거장이 던지는 묵직한 화두다. 닳고 닳은 사도세자 이야기를 다시 꺼내 지금의 시대정신으로 통찰한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의 비극과 화해하지 않으면 어떻게 용서를 하고 자기 승화를 할 수 있겠어요. 특히 비극을 소환해 재구성할 때는 분명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에도 과거에서 비롯된 많은 아픔과 갈등이 있잖아요. 250년 전의 사도에게 감정이입이 됐다는 건, 그들의 비극을 통해 자기 안의 상처를 엿봤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을 통해 내 자신이 정화되고 충만함을 느끼는 거죠. 고통 없는 정화는 없어요. 그래서 비극이 아름다운 것이죠."
이준익 감독은 영조-사도-정조 '3대'의 이야기를 헤겔의 변증법에 빗대어 '업(業)·덕(德)·복(福)'이라고 풀이했다. 영조가 아들을 죽이는 크나큰 '업'을 지었고, 사도가 아들 정조를 위해 영조를 향한 칼을 거두는 '덕'을 베풀었으며, 그렇기에 정조가 '복'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업덕복'이란 화해와 용서, 자기정화의 또 다른 표현일게다.
그렇다면 이준익 감독 영화 인생의 '업덕복'은 무엇일까?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업은 무지하게 많지." 어떤 작품들이 그가 떠올린 업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덕은 영화 '소원'이 아닐까 싶다. 2013년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아동성폭행사건의 피해 가족들이 일상성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따뜻하게 보듬어낸 수작 중의 수작이다. 이준익 감독의 변화는 이때부터 시작했다. "정말 '소원'을 통해 많이 배웠어. 정말이야. 배움이 컸어. 영화 인생 자체가 바뀐 거 같아." 그래서 지금 이준익 감독은 '사도'를 통해 '복'을 받을지 모른다.
지금 이준익 감독에겐 '사극 거장'이란 존경의 칭호가 따라붙고 있다. 사극을 제일 잘 찍는 감독이고, 사극을 가장 잘 이해하는 감독이란 뜻이다. 과거의 '황산벌', '평양성',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그리고 천만 영화 '왕의 남자'와 흥행 질주 중인 '사도'까지. 그가 사극 장르에 매료된 이유가 궁금하다. "내가 존재하는 건, 더 먼 과거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와의 연장선상이란 말이지. 나 또한 언젠가는 떠날 것이고. 그러니 내가 현존하는 지점에 나를 묶어놓아서는 안 된다고 봐요. 역사 속 인물을 타자화하지 말자는 거지. '사도'도 마찬가지고. 역사라는 사회적 유산을 소환해, 그들의 삶을 다시 밟아볼 필요가 있어요. 역사 속 인물을 통해 우리를 비춰본다는 건 결국 오늘을 얘기하는 일이에요. 그게 얼마나 행복한 거야. 거기에 앞서서 나에겐 끌림의 법칙도 있어요. 의지에 상관없이 끌리는 데 어떻게 하겠어. 그들의 아픔이 아름다운 걸 어쩌겠냐고.(웃음)"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