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는 절대 수준이 밀리지 않는다. K리거만으로도 대표팀을 구성할 수 있다."
"경기력만 좋다면 이동국도 뽑을 수 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다면 누구든 뽑겠다."
"해외파는 모두 내 머릿속에 있다. 지금은 K리그를 중점적으로 보겠다."
A대표팀 수장 신태용 어록이다. 지난 며칠 간 K리그 각 구장을 둘러보며 남긴 말말말. 의도는 명확하다. K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을 자극해 A대표팀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뜻이다. 울리 슈틸리케 전 감독 체제에서 A대표팀의 중심은 해외파였다. K리거는 냉정히 말해 들러리에 가까웠다. 그나마 뽑히는 선수들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K리그에서 대표팀에 대한 목표의식은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경쟁 분위기도 약해졌다.
하지만 신 감독 부임 후 기류를 바꿨다. 대표팀 개혁의 첫번째 과제는 K리거 기살리기다. '누구든 뽑힐 수 있다'는 확실한 동기부여를 줬다. 동시에 K리거의 위상을 높여주며 해외파와의 무한경쟁을 선언했다. 결론적으로는 대표팀의 힘을 높이기 위해서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반영됐다. 이란, 우즈베키스탄과의 '운명의 2연전'은 8월31일과 9월5일 열린다. 부상 중인 기성용(스완지시티) 손흥민(토트넘) 두 에이스는 아예 출전이 불투명하고, 다른 유럽파들도 시즌 초인만큼 제 컨디션을 찾기 어렵다. 한창 시즌 중인 K리거가 대표팀의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
신 감독이 깔아놓은 판에 선수들이 화답하기 시작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베테랑들이다. 사실 슈틸리케 체제 하에서 베테랑들은 설자리를 잃었다. 곽태휘(서울)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표팀에서 베테랑들을 찾기 힘들었다. 카타르전에서 모처럼 이근호가 발탁된 것이 전부였다. 대표팀은 2012년 런던올림픽 동메달 멤버들을 중심으로 젊은 선수들의 전유물이었다.
"나이는 상관없다"는 신 감독의 한마디는 베테랑들을 자극시켰다. 그간 찬밥 신세였던 베테랑들이 무더위 속에서 힘을 내고 있다. 대표적인 선수가 염기훈(수원)이다. 염기훈은 12일 인천과의 홈경기에서 1골-1도움의 맹활약을 펼쳤다. 전매특허인 왼발은 여전히 눈부셨고, 최전방과 측면을 오가는 움직임도 날카로웠다. 염기훈은 경기 후 "신 감독님이 나이에 상관없이 할 수 있다는 말씀하셨는데 저희같은 노장 선수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된다. 경기장에서 더 활발하게 뛸 힘이 난다"며 "대표팀에 간다는 것은 저희 운동선수로서는 큰 영광이다. 두려움보다는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서정원 감독도 지원에 나섰다. 서 감독은 "염기훈의 크로스의 질과 타이밍은 국내 최고 수준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갖고 있지 않은 타이밍과 정확성이 있다. 국가대표에 뽑힐 능력이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양동현(포항)도 빼놓을 수 없다. 득점선두를 달리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양동현은 12일 서울과의 원정경기에서 공격포인트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날카로운 움직임을 보이며 경기를 현장에서 관전한 신 감독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양동현은 이날 경기 전까지 2경기 연속골 행진 중이었다. 양동현은 그간 대표팀에 관한 질문마다 "마음을 비웠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내심 기대를 거는 모습이다. 올 시즌 양동현을 부활시킨 최순호 감독 역시 '양동현 사용법'을 공개하는 등 신 감독에게 홍보전을 펼쳤다.
이 밖에 지난 카타르전에서 홀로 빛났던 이근호(강원)도 소속팀에서 20대 선수 못지 않은 움직임을 보이며 팀을 2위로 이끌고 있고, 신 감독이 지목했던 이동국(전북)도 출전 경기마다 변함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신 감독의 눈길을 잡기 위한 베테랑들의 투혼, 월드컵행 기로에 있는 한국축구에 희망의 빛이 비치고 있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