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오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김종부 경남 감독(52)의 첫 마디였다. 정작 김 감독이 들어야 할 말이다. 18경기 연속 무패(12승6무)로 세운 챌린지(2부 리그) 신기록. 리그 36경기에서 69골을 몰아친 공격력. 김 감독은 뛰어난 지도력으로 팀을 우승시키며 클래식으로 이끌었다. 경남 역사상 최초의 우승이다.
그래서 말해줬다. "힘든 길 걸으셨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아이구 아닙니다."
그렇게 손사래를 치는 김 감독을 경기도 화성 진안동에서 만났다.
▶잡초
'아무것도 가진 게 없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가수 나훈아의 '잡초' 가사다. 딱 김 감독의 이야기다. 실제 애창곡이다. "듣고 있으면 그냥 내 이야기 같아요."
네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김 감독은 경남 통영 굴 양식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던 어머니 밑에서 컸다. 찢어지는 가난. 그래도 축구 하나만은 참 잘 했다. 최고 명문 고려대에 진학해 1983년 멕시코세계청소년선수권 4강 진출을 견인했다. 그는 축구 천재였다. 그라운드의 모든 걸 꿰뚫어 봤다. 하지만 그런 날카로운 시야로도 딱 하나만은 보지 못했다. 자기 자신에게 닥칠 잿빛 미래였다.
대학교 3학년이던 1985년, 현대 호랑이와 대우 로얄즈가 김 감독을 손에 넣기 위해 달려들었다. 상상 초월의 계약금, 거액의 연봉. 과열 경쟁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엔 김 감독은 너무 어렸다. 흔들리며 디딘 발걸음이 바로 낭떠러지였다. 프로 계약은 없던 일이 됐다. 고려대에서도 제명됐다. 가까스로 선수 자격을 살렸지만 꺾인 날개는 다시 펴지지 않았다. 김 감독은 30세에 은퇴했다.
먹고 살기 위해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십 수년 떠돌이 독거생활의 시작이었다. 서울로, 양주로, 또 화성으로. 그에게 남은 건 지독한 생활고 뿐이었다. "200만원 조금 넘는 월급이었다. 가족 생활비 주면 내 손에 남은 건 20만원이었다." 줄어드는 통장 잔고. 느는 건 빚과 고독 뿐. "평생 안 피우던 담배도 이 때 알았다."
▶민물장어의 꿈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가수 고 신해철의 노래 '민물장어의 꿈' 가사다. 역시 김 감독의 이야기다. 성난 파도 아래 깊디 깊은 곳에 닿고 싶었다. 기왕 시작한 지도자 생활, 뭐 하나라도 크게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벼랑 끝 김 감독의 선택은 공교롭게도 장어구이 식당. 바다장어를 다룬다. "지인들이 도와주셔서 시작할 수 있었다."
낮에는 K3 화성시청 감독, 밤에는 장어집 사장. 김 감독은 치열하게 살았다. 살이 빠지다 못해 입 안이 헐었다. 그래도 버티고 버텼다. '심해'에 닿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아무도 없는 휑한 원룸. 지쳐 쓰러진 김 감독은 어두운 천장을 매일 홀로 응시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떻게…." 고뇌가 유일한 말동무였다.
▶갈치조림
오랜 자취 생활에 김 감독의 요리는 수준급이다. 자신 있는 메뉴는 갈치조림. 양념, 재료 대충 넣는다고 작품이 완성되는건 아니다. "정말 미묘하다. 재료와 양념의 배합과 비율을 맞춰야 한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적절한 화력과 시간이다. 조림은 시간과 정성의 요리다." 이날 김 감독표 갈치조림을 맛보지는 못했다. 앞으로도 먹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맛깔나게 잘 할 것 같다. 경남을 보면 알 수 있다.
2015년 12월 경남 지휘봉을 잡은 김 감독은 적재적소에 필요한 선수들을 데려왔다. 재료를 갖춘 뒤 간을 맞췄다. 전술이다. 적절한 비율의 공수 균형. 그리고 진득하게 기다렸다. 2년의 시간. 잘 조려졌다. 첫 맛이 칼칼하고 화끈하다. 거침 없는 공격 축구다. 마무리 뒷맛은 달콤한 여운이다. 갈치가 가장 맛있게 살 오른 제철의 끝물 10월, 경남은 승격을 확정했다.
잡초의 꽃이 조금은 속살을 보인 것 같다. 깊디 깊은 바다, 장어는 비로소 거친 파도 속 고요한 그 곳에 닿은 듯 했다. 김 감독이 정성스레 만든 갈치조림은 바로 경남 축구팀이다. 승격의 짜릿한 맛을 350만 경남도민에게 바쳤다.
또 한번 정성을 다해 솜씨를 발휘했다. 6일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49재. 평생을 굴 껍질 깠던 어머니. 막둥이 아들의 눈물만 봤던 노모. 지금은 고향 땅 통영에 고이 잠들어있다.
"뭐 그냥…. 그냥 뭐…." 쉽게 말을 못한다. 애써 웃어봐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감사했다고, 죄송했다고. 그 곳에선 행복하시라고 말씀드릴 겁니다." 제철 지난 11월의 갈치. 그래도 어머니는 분명 "맛있다!"고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들, 힘들었지? 장하다"고 하셨을 것이다.
화성=임정택 기자 lim1st@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