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원 대한항공 감독(67)은 생각이 유연하다. 외국생활을 오래했다. 이탈리아 프로팀도 맡았고, 이란대표팀도 지휘했다. 박 감독의 배구 스타일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자율배구'다. 모든 걸 선수에게만 떠넘기는 배구가 아니다. 감독이 선수 개인별 특성과 성격까지 고려해 서브와 리시브 공식을 만들어 훈련하게 만든다.
그 중 하나가 서브 강도 향상이었다. 국내 세터들의 수준이 올라가 서브부터 상대 리시브라인을 흔들지 못하면 블로커들이 막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드시 강서브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사실 대한항공은 변화가 쉽지 않은 팀이다. 박 감독은 선수들이 자신의 배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 다행히 베테랑들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따라와준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선수들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는 자신부터 바뀐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박 감독은 술과 담배를 끊었다. 캐비어와 와인을 좋아하는 박 감독은 시즌 중 술을 단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구단 관계자가 저녁식사 때 반주를 권해도 철저하게 탄산음료로 대신했다. 담배도 끊었다.
박 감독의 최대 장점은 권위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일을 선수들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수행한다. 선수들과 소통하기 위해 메신저 사용법은 이미 일찌감치 배웠고 선수들의 사생활까지 파악하고 있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 박 감독은 선수들의 아이들을 예뻐하기로 유명하다. 이런 감독의 소소한 노력에 선수들도 마음을 열었다.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는 강한 믿음이 형성돼 있다.
올 시즌을 앞두고 박 감독은 리베로 영입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난 7월 현대캐피탈에 신인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을 내주고 정성민을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박 감독의 혜안은 적중했다. 정성민은 그야말로 팀의 보배가 됐다. 특히 현대캐피탈에서 여오현의 그늘에 가려 뛰지 못한 한을 챔피언결정전 때 폭발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번 시즌 유독 부침도 겪었다. 세터 한선수가 흔들렸고 '히든카드' 김학민이 좀처럼 터지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3라운드까지 3위를 유지했지만 현대캐피탈, 삼성화재와의 격차를 좀처럼 줄이지 못했다. 심지어 4라운드에선 한국전력에 밀려 4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5라운드에서 3위로 올라서며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냈다. 이 때마다 박 감독은 선수들에게 믿음을 보였다. 그 믿음이 대한항공의 저력으로 나타났다.
박 감독은 고정관념도 깼다. 일흔살에 가까운 나이지만 선진배구 흐름과 배구에 대한 열정은 젊은 감독 못지 않다. 또 이런 선진 시스템을 팀에 도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때문에 트렌드에 빠르다. 트렌드에 맞게 배구 색깔을 대한항공에 입혔다. 지난 시즌 리시브, 올 시즌 서브다.
그리고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미끄러진 이유인 체력에 신경을 썼다. 박 감독은 선수들의 유연성 향상을 돕기 위해 체조 전담 트레이너 영입을 제안했고 웨이트 트레이닝장 개선을 요청했다. 지난 시즌 드러난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자 대한항공은 새 역사를 창조했다. 1986년 구단 창단 이후 첫 V리그 챔프전 우승을 맛봤다.
박 감독은 챔프전을 우승한 최고령 감독이 됐다. 이전까진 2013~2014시즌 우승을 차지한 신치용 전 삼성화재 감독의 59세였다. 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