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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5관왕보다 값진 의미"…'벌새' 감독, 독립영화계 '기생충'으로 불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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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전 세계 25관왕 수상도 감사하지만, 그것보다 '벌새'에 담은 진심이 더 값진 의미로 다가와요."

성수대교가 붕괴된 1994년, 거대한 세계 앞에서 방황하는 중학생 은희가 한문 선생님 영지를 만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독립영화 '벌새'(김보라 감독, 에피파니&매스 오너먼트 제작). 독립영화계 '기생충'(19, 봉준호 감독)으로 불리며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벌새'의 연출자 김보라(38) 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동작구 사당동 아트나인에서 스포츠조선과 만나 '벌새'에 대한 연출 의도와 비하인드 에피소드를 밝혔다.

1994년을 배경으로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를 특별하게 그린 '벌새'는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자 문제작을 예고하며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섬세한 감성과 힘 있는 스토리로 138분을 가득 채운 '벌새'는 1994년을 지나온 3040대에게는 공감과 볼거리로 향수를 자극하며 진한 울림을 선사하고, 90년대와 사랑에 빠진 1020대에게는 보편적인 캐릭터와 뉴트로한 무드를 전하며 늦여름 극장가를 달굴 흥행 '비밀병기'로 떠오른 것. 무엇보다 신예 감독이라고 믿기 않을 정도로 묵직하고 힘있는 연출을 선보인 김보라 감독은 미래의 충무로를 이끌 기대주로 등극, 관심을 받았다.

동국대학교 영화과를 거쳐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영화과를 졸업한 김보라 감독은 2002년 단편영화 '계속되는 이상한 여행'으로 영화계에 입성, 이후 '빨간 구두 아가씨'(03) '귀걸이'(04) '리코더 시험'(11) 등의 단편을 선보였고 '벌새'로 본격 데뷔했다. '벌새'에 앞서 공개한 '리코더 시험'으로 그해 우드스톡영화제 학생 단편영화 부문 대상, 대구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김보라 감독은 '벌새'로 그야말로 화려한 데뷔식을 치르게 됐다.

이날 김보라 감독은 "'벌새'는 2012년 트리트먼트가 나오고 1년 뒤 시나리오가 완성된 작품이다. 지난해 촬영을 마친 걸 생각했을 때 약 6년 정도 걸려 만든 첫 작품이다. '벌새'를 한창 준비할 당시 연출도 했지만 동시에 학교에서 영화 강의를 나서며 돈을 벌었다. 그렇게 일을 해가며 번 돈과 여러 영화 단체의 지원을 받아 어렵게 '벌새'를 만들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나를 아는 지인이 농담처럼 '김보라는 30대를 다 바쳐 '벌새'를 만들었다'고 했다. 어디까지나 농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벌새'를 만드는 과정이 꼭 사법 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의 느낌이었다. 물론 사법 고시를 준비해 본 것은 아니지만 고시 준비 하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은 순간이 많았다. 고시 공부를 할 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합격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모든 게 정답처럼 노력해도 정답이 될 수 있는 게 아닌데 '벌새'가 꼭 그런 느낌이었다. 결국은 안 만들어질 수 있다는 불안함도 있었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돈도 모으는 것도 어려움이 많았다. 물론 '벌새'는 제작에 있어 거절당한 경우도 많았다"며 "주변에서 걱정도 컸고 기약 없는 무언가를 위해 나아가는 나 역시 고시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비슷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벌새'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애정을 전했다.

아프고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자신의 사랑을 전부 쏟아 만든 '벌새'라고 꼽은 김보라 감독. 그는 '벌새'를 통해 진짜 인간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보라 감독은 "우리 영화는 사회 문제, 가부장적 관습, 우정, 사랑 등 다양한 메시지를 포괄하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벌새'에 등장하는 인물을 그릴 때 선과 악을 구분 짓지 않고 더구나 단선적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폭력적인 장면과 선정적인 장면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드라마 감정상 할 수 없이 넣어야만 했던 몇몇 장면을 빼고는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게 그리려고 노력했다. 가부장적인 폭력성에 찬성하거나 합리화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며 "비정한 인물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고 반대로 좋은 모습으로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캐릭터를 사랑했다. 사랑의 마음으로 그린 인물을 비인간적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때론 따뜻하게, 때론 잔인하게 보일 수 있는 게 인간적인 면모인 것 같다. 이 작품 또한 단순히 착한 소녀의 성장기가 아닌 여러 빈틈 있는 캐릭터와 주인공이지만 이 또한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시선으로 그려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벌새'는 한국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수상 소식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관객상을 시작으로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집행위원회 특별상,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네레이션 14Plus 부문 대상, 제18회 트라이베카 영화제 최우수 국제장편영화상·최우수 여우주연상·촬영상, 제45회 시애틀국제영화제 경쟁 대상, 제38회 이스탄불국제영화제 국제 경쟁 대상, 제9회 베이징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 언급상, 제35회 LA아시안퍼시픽영화제 국제 경쟁 심사위원 대상 등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무려 25관왕 수상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거장 박찬욱 감독은 '벌새'를 두고 "속히 속편을 내놓으라"라는 특별한 추천사를 쓰기도 했고 몇몇 평론가들은 독립영화계 '기생충'이라는 호평을 쏟아내기도 했다.

역대급 수상 기록을 세운 김보라 감독은 "나도 나지만 함께 고생해준 배우들, 스태프들에게 값진 수상이었다. 다들 기뻐해서 너무 좋다. 주변에서 너무 많은 수상으로 부담이 크겠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수상에 의미를 두려고 하지 않아 아직까지는 큰 부담이 없다. 물론 '벌새'가 수상에 초점이 맞춰져 관객이 큰 기대를 걸 수 있고 또 막상 영화를 본 관객 중 '상 받았다고 해서 좋은 작품인 줄 알았는데 별로네' 할 수도 있다. 수상 이력 때문에 '기대가 너무 크면 어쩌지?'라는 마음도 한편으로 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지금은 마음을 내려놨다"고 머쓱하게 웃었다.

이어 "상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려고 하지 않다. 물론 감사하지만 상은 오가는 것일 뿐, 상에 의미를 두지 않고 작품에만 의미를 두고 싶다. 사실 내겐 관객의 반응이 가장 큰 힘이었고 상이었다. 영화 만드는 과정은 많이 아팠지만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큰 힘을 받고 보상을 받게된 것 같다. 다음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이 됐고 또 절대 잊지 못할 순간들이 많아졌다"고 밝혔다.

그는 "'벌새'를 만들면서 아쉬웠던 지점이 너무 잘하려고 애쓰다가 부러져야 했던 부분이 많았다. 애쓴다고 달라지는 것도, 변하는 것도 많이 없더라.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은 수상 결과를 만끽하는 것보다 개봉 준비를 차분히 하고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며 관객의 평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벌새'의 메시지가 진실되길 바랄 뿐이다. 악평도 호평도 있을 수 있다. 영화가 만들어진 이상 어떤 것도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단지 '벌새'에 담은 나의 진실한 마음이 관객의 마음에 와닿길 염원한다"고 고백했다.

또한 "독립영화계 '기생충'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는데 너무 감사한 일이다. 개봉을 앞두고 떨리긴 하지만 '이 영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야 한다'라는 마음이 사실 없다. 당연히 '벌새'를 위해 수고하고 함께한 분들에게 보답할 수 있도록 많은 관객이 봐주면 좋겠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독립영화계 '기생충'으로 남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사하고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국내에서 정식 개봉되기 전 해외 영화제를 통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벌새'. 한국적인 이야기지만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를 다뤘다는 지점에서 많은 해외 팬이 공감했고 지지했다는 후문. 이와 관련해 김보라 감독은 "'벌새'는 한국적인 이야기를 펼쳤지만 해외 관객 또한 공감을 많이 하는 부분이 있다.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을 건드린다고 생각했고 이런 '벌새'의 이야기가 전 세계에 통한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대학원 수업 시간에 한 교수가 클리셰를 피하는 방법을 물어보더라. 그 교수의 답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클리셰를 피할 수 있다'였다. 나 역시 클리셰를 피하고자 구체적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해외에서 관객의 평이 '다 내 이야기 같다'고 하더라. 인간의 아주 구체적이고 원형적인 이야기를 보여준 게 우리 영화의 장점이지 않을까? 비단 나만의 기억이고 나만 힘들었던 이야기로 접근했다면 원형적 서사를 못 보여줬을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그때 그 시절, 모두가 은희(박지후) 같고 은희 부모님 같았기 때문에 우리 영화에 공감을 해줬다"고 자신했다.

'벌새'는 박지후, 김새벽, 정인기, 이승연, 박수연 등이 가세했고 단편 '리코더 시험' '귀걸이' '빨간 구두 아가씨' 등을 연출한 김보라 감독의 첫 장편 독립영화다. 오는 29일 개봉한다.

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