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전영지 기자]"하얗게 불태우겠습니다. 죽을 각오로 뛰겠습니다."
'펜싱 어벤저스' 남자 사브르대표팀의 맏형, '1983년생 베테랑' 김정환(38·국민체육진흥공단)이 뜨거운 감동 투혼과 함께 값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4일(한국시각) 일본 지바 마쿠하리 메세홀B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펜싱 남자사브르 개인전 4강 무대, 김정환은 나홀로 살아남았다. 믿었던 세계랭킹 1위 오상욱이 8강에서 난적 산드로 바자제(산드로)에게 13대15, 2점 차로 석패했다. 세계랭킹 9위 구본길도 32강에서 아깝게 탈락했다.
루이지 사멜레(이탈리아·세계랭킹 11위)와의 4강전을 앞두고 '맏형' 김정환은 "죽을 각오로 해보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위기의 어벤저스, 펜싱코리아의 자존심, 동생들의 아쉬움까지 모두 짊어졌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도 남자 사브르에서 유일한 개인전 동메달을 따내며 자존심을 지킨 김정환이 또다시 치열한 도전에 나섰다.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금메달, 2018년 우시세계선수권 개인전 우승,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을 모조리 휩쓴 자타공인 '리빙 레전드' 김정환은 이번 도쿄올림픽 개인전에 나선 3명 중 가장 랭킹이 낮았다. 2015~2016시즌 세계랭킹 1위를 찍었던 에이스지만 은퇴, 복귀 공백으로 랭킹이 15위까지 하락했다. 상대적으로 험난한 대진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실력은 도망가지 않았다. 큰 무대에 강한 베테랑의 노련미가 빛났다. 32강에서 콘스탄틴 로카노프(ROC·세계랭킹 19위)를 15대11, 16강에서 세계랭킹 2위 미국의 일라이 더슈위츠를 15대9로 돌려세웠다. 8강전, 세계랭킹 8위 카밀 이브라히모프(ROC)와의 맞대결은 승부처였다. 1피리어드 5-8로 밀렸고 2피리어드 12-14까지 몰렸다. 이브라히모프가 1포인트만 찌르면 끝장인 순간, 기적 승부가 시작됐다. 투혼의 김정환이 3포인트를 잇달아 찔러내며 15대14, 대역전승을 완성했다. 그러나 사멜레와의 4강전 12-6으로 앞서다 잇달아 실점하며 12대15 아쉽게 역전패, 2대회 연속 3-4위 결정전에 나섰다. 후배 오상욱을 밀어낸 바자제와 동메달을 놓고 격돌했다.
1라운드를 7-8로 1점 뒤진채 마쳤다. 2라운드 7-10에서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막고 찌르기. 적극적인 공격으로 10-10까지 따라붙더니 어깨를 찌르며 연속 4포인트, 11-10 역전에 성공하더니 기어이 15대11,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38세 노장의 투혼은 눈부셨다. 매 포인트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피스트에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그의 간절한 포효와 뜨거운 기세에 상대가 기를 펴지 못했다. 펜싱코리아의 파이팅이었다.
원우영 SBS 해설위원은 "정환이의 플레이를 보니 울컥한다. 마지막 올림픽의 절실함이 느껴진다"고 했다. 말 그대로 '투혼'이었다.
김정환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직후 은퇴를 선언하고 국민체육진흥공단 플레잉코치로 일했던 김정환은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은퇴를 번복했다. 어벤저스 후배들과 함께 내년 항저우아시안게임까지 동행하기로 결심했다. 지난해 항공사 승무원인 변정은씨와 1년 열애끝에 결혼한 후 신혼의 단꿈을 뒤로 한 채 훈련에 몰입해왔다.
코로나로 인해 진천선수촌 외출, 외박이 전면 금지되면서 아내와 영상통화로만 만나야 했다. 김정환은 "아내가 '사이버 남편'이라고 한다. 아내는 내가 경기 뛰는 모습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잠옷 입고 TV 보는 것만 봐서 선수란 게 도무지 상상이 안된다고 한다. 이번 올림픽 무대는 아내와 장인, 장모님께 내 '본캐'를 보여줄 기회"라며 각오를 되새겼었다. 38세, 마지막 3번째 올림픽 도전을 앞두고 그는 "노장들의 희망이 되고 싶다"는 의지도 분명히 했었다.
오상욱의 대전대 스승인 도선기 감독은 "김정환은 실력과 인성을 두루 갖춘 선수다. 상욱이가 처음 대표팀에 발탁돼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친형처럼 잘 감싸주고 이끌어줬다고 들었다. 상욱이한테도 정환이형을 보고 배우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펜싱인들 중 김정환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펜싱 신사' 김정환이 기어이 역사를 썼다. 2012년 런던 금메달, 2016년 리우 동메달에 이은 2021년 도쿄 동메달이다. 아내에게 '본캐'를 증명했고 노장들에겐 희망의 증거가 됐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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