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이승미 기자]"배우 꿈 이룬 나, 다음 꿈은 '훌륭한' 배우죠"
오갈 수 있는 길은 기찻길밖에 없지만 정작 기차역은 없는 마을에 간이역 하나 생기는 게 유일한 인생 목표인 준경과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기적'(이장훈 감독, 블러썸픽쳐스 제작). 극중 주인공 준경 역의 박정민이 7일 화상 인터뷰를 통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동주'의 독립운동가 송몽규, '그것만이 내 세상'의 서번트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피아노 천재, '변산'의 허술한 래퍼 등 매 작품마다 놀라운 캐릭터 소화력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하고 있는 박정민. 특히 지난 해 개봉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트랜스젠더 역을 맡아 파격 변신, 청룡영화상을 비롯해 각종 영화상 트로피까지 싹쓸이 했던 그가 이번에는 따뜻한 휴먼 영화 '기적'으로 관객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극중 그가 연기하는 준경은 마을 역에 기차역 하나 짓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고등학생이다. 청와대에 요청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 한번 받은 적 없는 그는 친구인 라희(임윤아)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 위해 대통령배 수학경시대회까지 도전한다. 한편, 무뚝뚝하고 냉정한 원칙주인 기관사인 아버지 태윤(이성민)과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언제나 자기의 곁에 있어주는 친구 같은 누나 보경(이수경)을 향한 애정은 남다르다.개봉 전부터 유난히 영화 '기적'에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던 박정민은 "무엇보다 함께 한 사람들 덕분인 것 같다. 같이 영화를 만들면서 유독 특별히 돈독해졌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아껴주다보니까 이 영화에 대한 마음이 저절로 커졌다. 또한 모든 배우들이 영화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시나리오 때문이었는데 시나리오가 가진 힘이 너무 강하고 따뜻하고 마음을 울려서 자연스럽게 영화를 사랑하게 됐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시사회 전에 배우들이 다 따로 영화를 먼저 봤다. 저는 작은 관에서 회사 식구 몇명과 함께 봤는데, 영화는 많은 사람들끼리 보면 영화의 힘을 느낄 수 있는데, 사람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영화가 정말 좋았다. 저는 원래 스태프 시사회를 할 때, 함께 영화를 잘 보지 못하는 스타일인데, 이번 작품만큼은 다 같이 봤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좋았다"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함께 촬영한 배우들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드러낸 박정민은 "배우들끼리 호흡도 정말 좋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게 인터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오히려 조심스러울 정도로 좋았다. 작년 여름 촬영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이상하다. 정말 너무 좋았다. 사실 저는 제가 나온 영화를 재미있게 보지 못하는데, 이 영화는 촬영할 때 함께 만들었던 기억 때문에 조금 더 마음이 좋더라. 소풍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다"고 말했다.지난 해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파격적인 트랜스젠더 역할로 주목을 받았던 박정민.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순박한 시골 소년과의 캐릭터의 엄청난 갭 차이로 인해 부담감은 없었는지 묻자 "저는 파격적이고 특이하고 도전적인 캐릭터를 일부러 고르려 하진 않는 편이다. 다만 하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감독님께서 표현하신 단어가 적절하신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 준경은 한 영화에서 흰쌀밥 같은 역할이다. 내가 막 드러나지 않지만, 관객들이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고 자극적이지 않은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에 마침 '기적'을 만났고 준경을 만났다. 그런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독특한 역할을 해보다 보니까 '기적' 촬영 초반에는 내가 뭔가를 너무 안 하고 있는,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그런 연기를 좋아하셨고, 감독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감독님이 원하시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서 촬영을 편하게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극중 10대 고등학생 소년을 연기한 박정민은 "언론시사회 때 감독님께서 말씀해주신 것 처럼, 제가 이 시나리오가 처음부터 너무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할 수 없겠다고 말씀드렸던 이유가 바로 나이 때문이었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이어 "준경이는 17살인데 저는 34살이었다. 나야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쳐도 관객분들이 과연 그런 설정을 용서해주실까 싶었다. 그래서 시나리오가 너무 좋은데도 저는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려고 감독님을 찾아 갔었다. 그런데 감독님께서도 별의 별 아이디어를 쏟아내셨다. 첫 시작을 30대 준경으로 시작해서 플래시백으로 가보자는 아이디어도 나왔었다. 감독님께도 같은 고민을 하셨구나 싶기도 하더라"라며 "그런데 미팅을 하면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감독님 자체가 너무 좋은 사람이고 이 영화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미팅을 하면서도 마음을 조금씩 감독님께 빼앗겼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독님께서 '정준경'이라는 명찰이 달린 펭수 인형이랑 우산을 주셔서 더 마음을 빼앗겼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10대 소년을 연기하면서 노력한 지점에 대해 묻자 "10대의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했지만, 사실 10대 어떤 비주얼적 노력을 하려고 한 건 없다. 그냥 주변에 친구 역을 한 배우분들이 비슷한 연령대였고 그런 면에서 스태프분들과 감독님이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고 전했다.
강원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독특한 봉화 사투리 연기에 대해서도 말했다. "제가 사투리 연기를 안해본 건 아니지만, 사투리가 엄청 중요한 영화를 해본 적은 없다.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고 입을 연 박정민은 "우리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영화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사투리에 대한 부담이 너무 크더라. 그래서 사투리 선생님과 이야기를 많이 해봤는데, 처음에는 '이거 안되겠는데?'라며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대구 사투리 같은 걸 해보는게 어떨까 생각까지 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이어 "그런데 그렇게 하면 그 지역 사시는 분들이 실망하실 것 같더라. 그래서 이 사투리를 구사하는데 최대한 노력을 해보자 싶었다. 사투리 선생님도 따로 계셨고 영주나 안동에 가면 문화원이 있는데, 그 문화원에 가서 대본 검수도 받았다. 주연 배우들 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대사까지 다 녹음을 해주셨다. 안동 문화원에서 1년에 한번 사투리 경연대회를 하시더라. 거기서 1등하신 분을 찾아뵙기도 했다"고 부연했다.함께 한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도 전했다. 부자(父子) 호흡을 맞춘 이성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성민 선배님과는 정말 배우는 기분으로 연기했다. 선배 연기하는 걸 감탄하면서 구경하다가 제 대사를 까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고 했다.
앞서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이성민을 진짜 아버지처럼 느끼며 연기했다는 그는 "이성민 선배님은 정말 주변 사람들을 너무 잘 챙기는 분이다. 모든 스태프들에게도 마음을 쓰시는 분이다. 현장에서 근엄한 모습으로 계신다기보다는 어린 후배들과 농담도 많이 해주려고 하시고, 아이스브레이킹을 본인이 직접 하려고 하시는 분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선배님을 더 좋아하게 됐다. 제가 어릴 때 차이무에 잠깐 스태프로 있으면서 선배님을 보고 정말 많은 걸 보고 배웠었다. 그 시절에 제가 느꼈던 감정들을 선배님께 조금씩 내비치기도 했었다. 그러다보니까 어느 순간 진짜 아버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말 우리 아버지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런데, 이성민 선배님과 저희 아버지는 엄청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성민 선배님이 극중 연기하시는 무뚝뚝한 태윤과 제 아버지는 너무 닮았다. 그냥 무뚝뚝하게 '밥 묵자' 이런 태윤의 모습이 저희 아버지와 닮았다"고 덧붙여 눈길을 끌었다.임윤아와 이수경에 대해서는 "이 두 배우는 정말 이 영화에 진심이었다"라며 "그래서 어떤 장면을 찍을 때는 '표현이 안 되면 어떠나' 고민을 유독 많이 하더라. 그래서 촬영을 마치고 집에 가서 이들이 연기할 때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더라. 촬영하고 집에 가서 그런 마음이 든 적은 처음이다. 그래서 서로 통화도 많이 하고 그랬다"고 전했다.
이수경의 연기에 대해 감탄했다는 박정민은 "이런 단어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수경이의 연기에서 나오는 당돌함 당당함 같은 게 너무 좋더라. 정말 겁이 없는 연기를 하더라. 그래서 내가 저걸 받아주지 않으면 수경이에게도 손해고 나에게도 손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극중 아기자기한 귀여운 로맨스를 펼친 임윤아에 대해서는 "사실 윤아씨는 제 마음의 스타였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윤아씨에게 다가가서 어떻게 편하게 연기할 수 있을까 싶었다"라며 "그런데 촬영장에서 만나보니 윤아라는 사람 자체가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하는 어떤 장난을 재미있게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더라. 그래서 더 가까워졌고 전혀 어색함 없이 촬영할 수 있었다. 정말 급속도로 빨리 친해졌다. 현장에서도 정말 재미있었다"며 웃었다.박정민은 극중 준경처럼 남모르게 품고 있는 마음에 꿈이 있는지 묻자 "어떻게 보면 저는 꿈을 이룬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꿈 만큼 절실하게 꿈을 꿔본 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저를 배우라고 불러주신니 꿈을 이룬 사람이지 않나.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는 아직은 제가 배우라는 타이틀을 온전히 흡수하기에는 거부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의 저의 꿈은 그냥 '훌륭한' 베우가 되는거다"고 강조했다.
매 작품 마다 극찬을 받으면서도 "매 테이크 마다 내 연기에 좌절한다. 좌절이 취미다"고 말하는 박정민. 그는 "사실 좌절을 해야 그 안에 더 좋은게 나오고 동굴을 파고 들어가야 더 좋은게 나온다고 믿었었는데, 최근에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기적'이 내 생각을 많이 바꾸게 해줬다. 내가 굳이 우울해 하지 않아도 좋은 영화는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고 말했다.
'기적'은 '지금 만나러 갑니다'(2018)를 연출한 이장훈 감독의 3년만의 신작이다. 9월 15일 개봉.
이승미 기자 smlee0326@sportschosun.com,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