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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비장애 허물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미술 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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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주출입구로 향하는 야외 계단에 색색의 의자가 놓였다.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이 의자에는 누구나 앉아서 쉬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계단에 의자가 놓이면서 미술관에 들고 나려면 계단 대신 측면 경사로를 이용해야만 한다. 이 작품은 장애인의 시선에서 공간을 다시 살펴보도록 한 농인 작가 리처드 도허티의 '농인 공간: 입을 맞추는 의자'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고 몸과 감각에 대한 생각을 확장하는 미술 전시들이 전국 곳곳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장애를 가진 작가들의 작품부터 장애를 가진 이들을 돌보는 일이나 노화하는 몸, 신체의 다양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 관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작품까지 장애·비장애인 작가를 함께 소개하는 전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지난 16일 개막한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는 건강한 몸은 물론 장애가 있는 몸, 나이 든 몸, 아픈 몸 등 다양한 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거리를 던지는 전시다.
장애·비장애 작가 15인(팀)의 작품 40여점이 출품된 이 전시는 '아픈 몸=약한 몸'이라는 인식에 저항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보여준다.

캐나다 출신 작가 판테하 아바레시의 '사물 욕망'은 다리 보조기를 이용해 두 다리가 묶인 모습을 성적인 자세로 표현했다. 자유롭지 않은 장애인의 상황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욕망을 느끼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미국의 디자인 연구자이자 작가인 사라 헨드렌과 인류학자 케이트린 린치는 '집에서 엔지니어링하기'라는 작품에서 심장마비로 다리와 손가락을 잃은 '신디'의 이야기를 전한다. 신디는 로봇 손을 쓰는 대신에 쉬운 기술로 혼자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다. 병을 쉽게 열 수 있도록 뚜껑에 플라스틱 후크를 붙이거나 실리콘 덩어리를 포크에 붙여 포크를 쥘 수 있도록 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작은 장애를 가진 누군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데 첨단의 기계장치가 아닌 일상적인 사물을 간단하게 변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구화인(청각장애가 있지만 보청기 등을 사용해 소리를 듣고 입술을 읽으며 말과 글로 의사 소통을 하는 사람)인 김은설 작가의 '흐려지는 소리, 남겨진 소리'는 소리가 나오는 영상을 반투명한 벽을 통해 봐야 하는 작품이다. 반투명한 벽 때문에 영상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흐릿한 소리는 반투명 벽을 통해 진동으로 전해진다. 잘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잔상처럼 흐려지고 진동으로 느껴지는 구화인의 경험이 담긴 작품이다.
알레시아 네오 작가는 돌봄을 이야기한다. '땅과 하늘 사이'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이들의 몸짓을 담은 영상 작품이다. 참여자들은 슬프거나 답답하거나 혹은 끝까지 돌보고 싶은 마음 등 정신질환이 있는 가까운 이들을 돌보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춤과 몸짓으로 표현한다. 전시장에는 관객들도 누군가를 돌볼 때를 생각하며 '돌봄의 몸짓'을 춤으로 기록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전시와 연계해 서울관에서는 퍼포먼스와 대담,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휠체어를 탄 변호사에서 안무가로 변신한 김원영과 정지혜 안무가는 두 개의 몸이 서로의 '보철'(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도구)이 되어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공연을 펼치고, 여성학자이자 활동가인 김영옥은 늙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에서 자유롭게 나이 드는 방법을 강연한다. 전시는 7월20일까지. 유료 관람.
부산현대미술관에서는 지난 8일 무장애 전시를 표방하는 '열 개의 눈'이 개막했다. 감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나이나 신체 조건,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시각이 아니라도 세상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시각이나 청각 등을 제한한 채 제작된 작품들이 다수 나왔다.
눈을 가린 상태에서 손가락이나 손바닥에 흑연을 묻혀 종이에 흔적을 남기는 방식으로 손가락의 반복된 움직임을 실험하는 로버트 모리스의 작품, 뇌출혈 이후 왼손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라움콘(Q레이터, 송지은)의 '한 손 프로젝트', 일본 시각장애인 사진가의 사진에 재즈 음악을 입힌 정연두의 작품 등이 출품됐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부산맹학교의 저시력 학생들과 돌봄 단체의 발달장애인·복지사, 감각을 주제로 활동해온 예술가들이 함께했던 사전 프로젝트 등을 토대로 기획됐다. 전시는 9월7일까지.

《열 개의 눈》 라일라 카툰 애니메이션[출처: 부산현대미술관 유튜브 채널][https://youtu.be/hoqp53H9J7c]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도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 전이 열리고 있다. 다른 사람의 감각을 상상해 보는 전시로, 관객의 참여로 완성된다.
모모세 아야 작가의 '녹는 점'은 마치 바(bar)처럼 꾸며진 공간에서 작가의 체온에 맞춘 온도의 물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퍼포먼스 작품이다. 작가는 해외에 체류하지만 전시 기간 작가가 착용하는 기기를 통해 실시간 체온 데이터가 광주로 전송되고 퍼포머는 물의 온도를 작가의 체온에 맞게 조정해 제공한다. 관객은 간접적으로 작가의 체온을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송예슬의 '보이지 않는 조각: 공기조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진동과 온도, 촉감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시각장애 학생들과 함께 다양한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엄정순 작가는 제목 그대로 코가 없는 대형 코끼리 형태 작업인 '코 없는 코끼리'를 선보인다. ACC 전시는 6월29일까지 진행된 뒤 7월23일부터는 서울에서 이어진다.
이들 전시는 나이와 성별, 장애 여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쉽게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접근성 강화에도 신경을 썼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전시장 내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블록을 설치했고 느린 학습자들도 쉽게 전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벽에 붙은 전시설명을 '쉬운 글'로 작성했다. ACC 전시는 어린이와 시각장애인을 위해 벽면에 촉감 바(Bar)를 설치해 전시 동선을 안내하고 점자책과 게임 방식의 오디오 가이드 등을 마련했다. 또 전시장에는 전시 이해를 도와주는 접근성 매니저가 상주한다.

zitrone@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