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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모리야스가 튼 물꼬, 한-일 축구 '숙적→동료' 새 전기 마중물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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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박상경 기자] '지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 예선을 치르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던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썼던 각서다. 독립 10주년이 채 안됐던 그 때, '일본'이란 두 글자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도쿄 한복판에서 '극일(克日·일본을 넘는다)'을 이룬 대표팀은 그렇게 사상 첫 월드컵 본선행의 역사를 썼다.

한국 축구가 오랜 기간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도 '극일'이 있었다. 반 세기 동안 한국 스포츠의 '극일 선봉장'을 자처해왔다.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복귀 순간 뿐만 아니라 도하의 기적, 도쿄대첩, 런던신화 등 수많은 드라마가 한-일전에서 쓰였다. 일본에게도 한-일전은 자극이었다. 한국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붉은 벽'이었다. 치열한 라이벌 의식 속에 성장한 양국의 축구는 이제 세계 무대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양강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이제 한-일 축구는 단순한 경쟁 이상의 관계다. 공존과 협력이 불가피한 시대다. A매치 유치가 단적인 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대륙간 이동을 제한하는 A매치 규정을 신설한 뒤, 대륙별 경기 일정 등을 맞추다 보면 초청 상대는 엇비슷 해졌다. 대한축구협회(KFA)와 일본축구협회(JFA)는 협력을 통해 여러 A매치를 성사시켜 왔다. 축구 외교도 마찬가지다. 중동세가 장악 중인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 한국과 일본은 유이하게 목소리를 내는 동아시아 국가 역할을 하고 있다. 동아시아 축구 권익 도모와 발전을 위한 동아시아축구연맹(EAFF)의 설립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밖에도 폭넓은 아마추어 교류와 양국 프로리그 협력 등 한-일 축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지 오래다. K리그가 먼저 도입한 VAR(비디오판독), 일본이 내년부터 도입하는 J리그 추춘제 등 양국이 다양한 케이스를 통해 피드백을 얻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런 가운데 이뤄진 홍명보-모리야스 감독 간의 대담의 의미가 적지 않다.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해 일본 언론 초청으로 이뤄진 이번 대담에 대해 홍 감독은 최근 대담에 대해 "과거부터 미래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것과 미래에 올 것에 대해 예측할 수는 없지만, 예측 가능한 부분에 대해 논했다. 좋은 시간이었다"며 "처음이었지만, 이런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도, 한일 양국 축구에게도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모리야스 감독도 "두 팀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동료로서, 세계를 향해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좋은 경쟁자이자 동료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양국 축구의 정점인 A대표팀이 그동안 경쟁에 모든 포커스를 맞춰왔던 점을 돌아보면 만남 자체가 생소하고, 색다르게 느껴진다. 하지만 결과라는 압박감을 넘어 팀 운영 철학을 공유하고 미래를 전망했다는 점에서 한-일 양국 축구가 더 높은 단계의 협력으로 들어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손흥민(33·토트넘 홋스퍼), 이강인(24·파리 생제르맹), 김민재(29·바이에른 뮌헨) 등 빅클럽 핵심 멤버들을 계속 배출하는 한국 대표팀의 강점, 독일 사무소를 바탕으로 유럽파 전반을 관리하는 일본 대표팀의 시스템 등 양팀이 서로에게 배우면서 시너지를 낼 가능성은 무궁무진 하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선의의 경쟁 의식에 더해 발전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설정한다면 그 파급력은 상당할 전망이다.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경쟁에 머물렀던 한-일 축구는 새로운 전기 앞에 서 있다. 홍명보 감독과 모리야스 감독이 튼 물꼬가 양국 축구의 더 큰 발전으로 이어지는 마중물이 될 지 관심이 쏠린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