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연합뉴스 우분투추진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대한민국이 아프리카 외교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 배경에는 북한의 적극적인 아프리카 외교가 있었다. 6.25전쟁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해야 했던 남한과 북한은 1960년대 여러 아프리카 국가가 독립하면서 아프리카 국가들과 수교 체결을 위한 외교전을 치열하게 벌였다. 특히 1970년대 남한은 북한이 비동맹운동과 아프리카 독립운동을 외교 무대로 활용하자 이에 맞서기 위한 외교 전략으로 매년 친선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아프리카에 외교적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냉전 시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전이었다. 양측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을 대상으로 경제적·이념적 연대를 각각 시도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역사적 유대감은 국제 외교 지형 속에서 아프리카 국가들과 관계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나미비아는 굉장히 흥미로운 사례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남한은 나미비아가 독립을 쟁취한 1990년 이후부터 수교를 체결했지만, 북한은 나미비아의 해방 운동 초기부터 적극 개입했기 때문이다.
1884년 독일의 보호령으로 식민 지배를 받은 나미비아는 1904∼1908년 헤레로(Herero)와 나마(Nama) 민족을 대상으로 한 독일의 집단학살을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남아프리카연방의 위임통치를 받았다. 이에 따라 인종에 의한 분리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직접적 지배를 받았다. 당시 남서아프리카에서는 1960년대부터 독립운동이 본격화됐다. 그 중심에는 남서아프리카인민기구(SWAPO)가 있었다.
북한은 이러한 해방운동에 일찍이 개입했다. 스스로 '사회주의 탈식민 중견 국가'로 자처한 북한은 SWAPO를 '형제 민족'으로 규정했다. 평양에서 간부들을 훈련하는 등 군사·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나미비아 독립박물관에는 SWAPO의 당수이자 나미비아 초대 대통령인 샘 누조마를 비롯한 SWAPO 관리들이 독립 전 평양을 정기적으로 방문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나미비아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남아프리카연방(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신)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점에서 북한은 나미비아의 독립운동을 반제국주의·반미투쟁의 연장선으로 인식했다. 이에 따라 좀 더 적극적인 외교적 접근이 가능해졌다. 더욱이 북한의 '천리마 운동'과 같은 자립적 민족경제 모델 역시 식민과 수탈의 상처를 지닌 아프리카 국가들에 하나의 대안적 발전모델로 소개되기도 했다.
1990년 나미비아가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북한과 나미비아는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2017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이행이 한창일 때조차 북한 만수대해외개발회사그룹은 나미비아에서 여전히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도 빈트후크 중심부 로버트 무가베 거리에 있는 독립기념관(2014년 준공)과 나미비아 대통령궁(2008년 준공), 남쪽 외곽의 국립영웅묘지(2002년 준공)등을 북한이 설계하고 시공했다. 군사장비 제공, 기술인력 파견 등 협력도 계속됐다. 심지어 유엔의 대북 제재가 강화된 이후인 2010년도에도 북한은 나미비아에 탄약공장을 건설한 정황이 확인될 만큼 양국 관계는 깊고 오래됐다.
이에 비해 남아공 등 반공진영 국가와 관계에 초점을 맞췄던 남한의 아프리카 외교는 나미비아 독립운동에 대한 외교적 지지나 협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외교사료원에서 공개된 '국교 수립-나미비아' 외교 문서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북한의 비동맹 외교를 견제하기 위한 대응 전략으로 나미비아 문제에 대해 적절한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정부는 1979년 유엔에서 모금하는 나미비아 기여금에 1만달러를 기부했다. 이어 1980년 유엔 반(反)아파르트헤이트특별위원회가 주최한 국제인종차별철폐의날 행사에 5만달러 기부를 서약했다. 또 잠비아 소재 나미비아 훈련원을 짓기 위해 SWAPO 대표부에 이를 공식 제의하는 등 나미비아 독립 후 수교를 위한 사전기반 조성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나미비아가 독립 이후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단순히 이념적 편향을 보이지 않은 채 자국의 역사적 경험과 실용적 판단에 기반해 균형 외교를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과 관계는 해방운동의 연대와 역사적 기억에 바탕을 두고 지속되고 있다. 남한과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 개발협력과 미래지향적 협력이 모색되고 있다.
이는 탈식민 이후 아프리카를 비롯한 신생 독립국들이 단순한 외세 추종국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들 스스로 정체성과 국익을 기반으로 국제질서에 개입하고 있다. 특히 나미비아 독립 이후 줄곧 집권당을 이어온 SWAPO의 남북한에 대한 인식은 세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 해방운동 과정의 경험과 기억이 있는 시니어 그룹은 북한 해방운동의 도움을 갚아야 하는 것으로 기억한다. 이에 비해 주니어 그룹은 실리에 기반한 남한과 새로운 관계의 물꼬를 틀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미비아 정부는 독일 정부의 집단학살에 대한 보상금(약 11억유로·1조7천305억)으로 친환경 수소 에너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도 각각 나미비아에서 생산되는 희토류 확보를 위한 진출에 적극적이다. 중국은 자원 협력뿐만 아니라 우주개발 분야에서도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은 나미비아와 협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
2023년 기준 나미비아의 불평등지수는 59.1로 남아공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2024년 나미비아 국민총생산(명목 GDP)은 127억7천만달러(약 17조3천억원)로 세계은행 기준으로는 고소득국에 해당한다. 이러한 분류로 인해 개발협력 대상국에서 제외됐고, 의미 있는 산업·경제 및 프로젝트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원조의 개념은 단순 소득수준을 넘어, 사회 취약계층을 포괄하는 지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고려할 때 국민소득은 높지만 불평등 지수가 높은 나미비아와 같은 국가에 대한 맞춤형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한국의 아프리카 외교 관계를 심화하고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나미비아는 남한과 북한 간 외교의 교차점에서, 탈식민주의적 역사와 냉전 이후의 실용 외교가 어떻게 결합하고 충돌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동시에 냉전시대의 기억이 오늘날 외교관계와 전략적 선택에 여전히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말해준다. 남북한이 펼쳐온 아프리카 외교는 더 이상 단순한 이념의 확산 경쟁이 아니다. 역사적 정당성과 미래지향적 협력이라는 두 층위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에 의해 선택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대(對)아프리카 외교도 개발협력 차원뿐 아니라 상호 발전을 위한 외교적 자원 마련과 관심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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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준화 박사
현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아시아-아프리카센터 선임연구원(창립멤버), 신한대 겸임 교수, 영국 런던대(SOAS) 정치학 박사, 연세대·한국외국어대 연구교수 및 강사 역임. 주요 연구 분야는 아시아-아프리카의 국가 간 외교 관계, 아프리카 개발협력, 아프리카 선거, 분쟁, 이주 난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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