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um App

Experience a richer experience on our mobile app!

[다문화 3.0] 이웃사랑 한가득…'봉사왕' 된 똑순이 태국 며느리

by


소라핌알리사씨, 평창올림픽 통역부터 계절근로자 돕기, 요리 강의까지
퇴직 후 적십자 봉사·의용소방대 활동 목표…"어르신 보면 고향 생각 나"

(정선=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아이구야,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크게 봉사한 일도 없는데…"
인터뷰 일정 조율을 위해 건 통화에서 수화기 너머로 구수한 탄식이 먼저 흘러나왔다. 올해로 한국에 정착한 지 20년이 된 태국 출신 소라핌알리사(50)씨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며 손사래 친 알리사씨의 부인과 달리 알리사씨 손길의 흔적은 지역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결혼으로 이주하기 전 고국에서도 9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원들의 고충 상담을 하고, 회사에 직원들의 목소리를 전달했다는 알리사씨는 한국에 정착한 뒤에도 새마을운동회 활동을 오래 한 남편을 따라 마을에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밥을 짓는 등 봉사활동을 했다.
육아하랴, 살림하랴, 농사일하랴 바쁜 와중에도 늘 '이웃을 돕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던 알리사씨에게 2018 평창동계올림픽 태국·라오스 통역 자원봉사의 기회가 찾아왔다.
때마침 자녀들이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면서 육아가 한결 수월했던 시기였다.
생배추 냄새에 김치도 먹을 줄 몰랐던 이주 초기와 달리 "김치 없으면 못 살아요"라고 할 정도로 10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한국 문화와 언어에 능통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남편 권유로 자원봉사에 지원하고, 면접까지 거쳐 합격한 알리사씨는 평창올림픽 성공 개최의 숨은 주역인 자원봉사자로서 1개월간 올림픽 무대를 누볐다.
"진짜 기억에 많이 남아요. 도움을 드리면 기념으로 사진도 같이 찍고, 그러면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다른 나라의 문화도 알게 되어서 좋았어요."

언어를 활용한 재능기부는 정선군이 2023년 1월 라오스 노동사회복지부와 외국인 계절근로자 도입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고, 계절근로자를 유치하면서 다시 빛을 발했다.
라오스어가 태국어와 유사한 측면이 있어 농가 입장에서는 알리사씨의 도움이 절실했다.
계절근로자 도입 첫해 알리사씨는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농가 주인과 계절근로자 간 의사소통을 돕고, 계절 근로자들을 위해 한국어로 된 근로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봐 주며 불이익이 없도록 신경 썼다.
도입 첫해 시행착오가 많았던 만큼 "그땐 정말로 많이 뛰어서 밤 9시에도 집에 못 들어갔다"고 알리사씨는 회상했다.
계절근로자 농가 통역 자원봉사 3년 차인 지금이야 계약서도 라오스어로 만들어주고, 3년 연속 정선을 방문한 계절 근로자들은 능숙하게 일하기에 알리사씨의 손이 덜 가는 건 사실이다.
이제는 영상 통화로 설명을 돕거나, 농가 주인이 바깥에 있더라도 "형수, 오늘은 계절 근로자들한테 이렇게 일하라고 얘기해줘"라는 전화가 오면 알리사씨가 계절 근로자들에게 손쉽게 설명할 수 있다.
다만 농가 주인과 계절 근로자들의 마음이 항상 잘 맞을 수는 없기에 마음 쓰이는 일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장님들은 '여기다가 콩을 심어라'라고 했는데, 애들이 밭을 잘못 찾아가서 남의 밭에 심은 거예요. 다 파내고 다시 심을 수도 없잖아요. 사장님은 울고불고, 애들은 애들 대로 '사장님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고 토로해요. 그래서 가끔은 사장님들에게 '10년 농사지은 사람은 다 알지만, 계절 근로자들은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다'고 얘기하죠."

알리사씨는 또 지난해부터 정선군 가족센터에서 연 다문화 자신만만 세계요리대회에 강사로 나서 태국 요리를 알려주며 지역사회에 더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사회봉사와 지역사회 발전에 힘쓴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해에는 정선군 양성평등대회에서 봉사상을 받았다.
알리사씨는 "아이들 키우면서 집에만 있으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몰랐는데, 봉사활동을 해보니 배울 게 참 많다"며 봉사활동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이웃 전봉순(73)씨는 알리사씨에 대해 한마디로 "똑소리 난다"고 했다. 전씨는 알리사씨와 마치 엄마와 딸처럼 지내며 아이를 대신 봐주는 등 알리사씨가 '나도 언젠가 이웃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싹트게 한 인물이다.
전씨는 "행사장에 가보면 얼마나 빨리 이리저리 뛰면서 잘하는지, 이런 며느리를 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한국 사람 뺨치게 아주 상냥하고 살림도 애들도 잘 키우고, 살림도 똑소리 나게 한다"고 치켜세웠다.
현재 군부대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알리사씨는 퇴직 후 대한적십자사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하거나 의용소방대원이 되는 게 꿈이다.
"어르신들 보면 고향 부모님 생각이 나요. 반찬이라도 가져다드리고 싶은데 아무 소속 없이 남의 집에 가면 불편해할 것 같고, 오지랖 떠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더라고요."
봉사활동을 꿈꾸는 결혼 이주 여성들에게 알리사씨는 "한국말이 서툴러도 천천히 얘기하면 한국 사람들이 다 들어준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서툴다고 망설이지 말고 '좀 도와드릴까요' 하고 더 나서세요"라고 조언했다.
맛이 없어도 취재진에게 꼭 태국 음식을 해주고 싶다며 한 상 가득 차린 알리사씨의 손 큰 마음씨처럼 봉사활동을 향한 그의 진심이 오늘도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전한다.

conanys@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