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과밀 해소·지방소멸 대응 명분 속 지자체 유치전 과열
단순이전 아닌 산업 연관성·정주여건 개선·인재 양성 맞물려야
(전국종합=연합뉴스) 정부가 수도권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골자로 한 '2차 공공기관 이전'을 국정과제로 제시하면서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이 일제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수도권 과밀 해소와 지방 소멸 대응이라는 국가적 목표와 맞물리면서 각 지자체는 신규 공공기관 유치를 지역 도약의 계기로 보고 있다.
일부 지자체는 수십 개 기관 유치를 목표로 내거는 등 '출혈 경쟁' 우려도 커지고 있다.
◇ 20여년 만의 공공기관 이전
공공기관 이전은 노무현 정부 초기 국가 균형발전 전략의 핵심으로 추진된 정책이다.
당시 정부는 2005년 수립한 공공기관 이전 계획에 따라 전국 10곳을 혁신도시로 지정하고 2012년부터 한국전력공사와 한국토지주택공사 등 153개 공공기관을 단계적으로 이전했다.
이 정책은 지역경제 활성화와 수도권 집중 완화라는 성과를 남겼다.
전남 나주는 한국전력과 에너지 관련 기관 집적을 통해 '에너지 메카'로 자리 잡았고, 강원 원주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중심으로 보건의료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정주 여건 미흡, 지역 산업과의 단절, 수도권 본사-지방 이전 기관 간 불균형 같은 구조적 한계도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도 2차 공공기관 이전을 시도했으나 이해관계 조정 난항 등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는 지난달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2차 공공기관 이전'을 명시했다.
1차 이전에서 드러난 한계를 보완하고 각 지역의 특화 산업과 연계할 수 있는 맞춤형 이전 전략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이 계획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확정되면 20여년 만에 2차 이전이 본격화되는 셈이다.
아직 구체적인 로드맵은 나오지 않았지만, 정부는 연말까지 '혁신도시 성과 평가 및 정책 방향' 연구 용역을 마치고 내년께 이전 대상 기관과 추진 일정 등 기본 방침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 전국 지자체 '기관 모시기 전쟁'
세부 계획 발표 전부터 지자체들의 물밑 경쟁은 이미 달아오른 분위기다.
광주·전남은 인공지능(AI)·에너지 산업과의 연계를 전면에 내세웠다.
광주는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한전 인재개발원 등 에너지 분야와 AI 분야로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을 유치 대상기관으로 꼽고 있다.
전남은 농협중앙회·수협중앙회 등 공적 자금이 투입된 금융기관과 함께 한국지역난방공사와 한국환경공단 등의 이전을 희망하고 있다.
전북은 '농생명 수도'를 기치로 농협중앙회, 한국마사회, 한국국방연구원, 국기원, 한국투자공사 등을 요구 목록에 올렸고, 대구는 IBK기업은행,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 등 30개 기관 유치를 희망하고 있다.
부산은 해양수산부 이전의 시너지를 위해 해양 관련 공공기관의 동반 이전을 주장하며 지난 정부에서 지방시대위원회 심의를 통과한 산업은행 유치도 거듭 요구하고 있다.
경남은 2024년 우주항공청 유치 경험을 바탕으로 기계·항공·방위 등 전략산업과 연관되거나 경남혁신도시 입주 기관과 시너지가 큰 대형 기관을 목표로 삼고 있고, 경북은 농협중앙회, 한국마사회, 새마을운동중앙회 및 연수원을 핵심 타깃으로 정하고 총력전에 나섰다.
대전·충남은 공공기관 '우선선택권'을 요구하고 있다. 세종시 건설 여파로 혁신도시 지정에서 제외됐다가 2020년에야 추가 지정돼 1차 이전 혜택을 받지 못한 만큼 2차에서는 우선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논리다.
충북은 한국공항공사, 한국지역난방공사 등 시장형 공기업을 최우선 유치 대상으로 점찍었다.
제주도도 한국공항공사, 한국마사회 등 7개 기관을 후보군으로 정해 유치전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 균형발전 취지 살린 '큰 그림' 필요
전문가들은 2차 공공기관 이전이 균형발전이라는 취지를 살리려면 단순한 기관 이전이 아니라 지역산업 생태계와의 연계, 정주 여건 개선, 인재 양성 등과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1차 이전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분석해 수도권 과밀 해소와 지방소멸 위기 대응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풀어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한국지방정치학회장인 이재현 배재대 교수는 연합뉴스에 "1차 이전에서 나타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단순히 건물만 지방으로 옮기는 결과가 될 수 있다"며 "지역 산업과 연계해 주거·교육·문화 인프라 확충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자체 간 과열 경쟁이 계속된다면 균형발전이라는 큰 틀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특히 혁신도시와 비혁신도시 간 대립이 뚜렷하다.
혁신도시는 "법과 제도적 기반 위에 조성된 만큼 2차 이전 역시 혁신도시로 와야 한다"며 집적 효과를 강조한다.
반면 비혁신도시는 "1차 이전 때 소외를 감내한 만큼 이번에는 기회를 달라"며 맞서고 있다. 이들 지역은 혁신도시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거점도시로서 충분한 수용 능력과 발전 잠재력을 강조한다.
육동일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은 "공공기관 이전이 지자체간 과열 경쟁에 의해 정치적 힘의 논리로 이뤄진다면 부작용만 커질 것"이라며 "적절한 대화와 타협으로 합리적인 배분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2차 공공기관 이전은 수도권 과밀 해소와 지방 소멸 대응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중대한 시험대"라며 "과열 경쟁 속에서도 정부가 균형발전이라는 큰 그림을 놓치지 않고 합리적 해법을 마련할 수 있을지가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종구 전창해 형민우 임채두 허광무 한무선 김선호 이정훈 이승형 고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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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