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보다 화려한 경주의 밤
(경주=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천 년 동안 한 번도 수도의 지위를 내놓지 않았던 경주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
문무대왕릉이 있는 동해의 일출은 장엄했고, 황리단길은 활력이 넘쳤다.
동궁과 월지, 첨성대, 월정교의 야경은 '한여름 밤의 꿈'과 다르지 않았다.
◇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문무대왕 수중릉과 감은사지 삼층 석탑
문무대왕릉 뒤로 붉은 해가 떠오르자 사진작가들이 일제히 셔터를 눌렀다.
백사장에는 간절히 기도 올리는 중장년의 남녀들도 눈에 띄었다.
신라 30대 문무대왕(재위 661∼681)은 태종 무열왕의 아들로, 아버지가 시작한 삼국 통일의 위업을 완성한 인물이다.
백제를 무너뜨린 무열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당의 침략을 막아 마침내 삼국을 통일했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며 자신을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했다.
경주 감포 앞바다 문무대왕릉은 헤엄쳐서 닿을 수 있을 듯, 해안에서 지척이었다.
생전에는 명군이었고, 사후에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는 전설은 그를 신격화하고 숭배하는 배경이 됐다.
해 뜨기 전 새벽, 문무대왕릉 앞에 꿇어앉은 기도는 문무대왕의 기운에 기대 소원을 이루고자 함이었다.
감은사는 문무대왕이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절이다.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언덕 위 널찍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지금은 3층 석탑 2기와 금당, 강당 등의 터만 남아 있다.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쌍탑이다. 1탑이었던 신라 석탑 양식은 삼국 통일 후 쌍탑으로 바뀐다.
그 과정에서, 최초로 등장한 쌍탑이 감은사지의 두 탑이다. 경주에 있는 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다.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서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두 탑은 한국 석탑의 원형이라고 할 만하다.
감은사지를 새벽이나 아침에 방문할 수 있다면 행운이다.
잠에서 깨어나는 만물의 생동을 오감으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감은사지는 적막한 '폐사지의 미학'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APEC 정상 부처의 방문지 후보 1순위…대릉원, 동궁과 월지
제대로 관리된 유적지만 한 시민 공원도 흔치 않다.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군인 대릉원은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 휴식의 공간이었다.
수백 년 됐을 듯한 굵직굵직한 소나무가 울창한 대릉원에서 경주 시민들은 관광객들과 섞여 쉬기도 하고, 산책도 했다.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등 27기의 능이 대릉원에 있다.
이 중 천마총은 유일하게 일반 관람이 허용된 고분이다.
상을 놀라게 한 '천마총 장니'가 출토된 곳이다. 장니는 말 탄 사람에게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에 달거나 덮어씌우는 말다래라는 장비이다.
자작나무를 여러 겹 덧대 만든 이 말다래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천마가 불을 뿜으며 날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천마도로 명명된 이 그림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라 그림이다.
천마총의 이름도 이 말다래에서 유래했다.
대릉원 담장 밖에도 발굴 작업을 거치지 않은 커다란 고분들이 도열하듯 연이어 솟아 있었다.
삶 속에 죽음이, 현재 속에 과거가 펼쳐져 있었다. 죽음 속의 삶, 과거 속의 현재라고 말을 바꾸어도 성립한다. 생경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동궁과 월지'는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됐던, 신라 왕실 별궁 터이다.
조선 시대에 기러기(雁)와 오리(鴨)가 날아오는 연못이라고 해서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렸다.
1980년대 이곳에서 '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된 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이곳에서 신라는 국가적 경사가 생겼을 때 축하연을 거행했고,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었다.
APEC 정상회의장은 보문 단지에 있는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이다. APEC 일정은 8월 초 현재 확정되지 않았다.
대릉원, 동궁·월지는 불국사, 석굴암과 함께 정상 부부들의 예상 방문지 1순위로 꼽힌다.
◇ 경주 여행의 시작과 끝…황리단길
방학과 휴가철이어서인가. 황리단길에는 뙤약볕을 아랑곳하지 않는 청춘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황리단길은 황남 큰길이라고 불리던 황남동 일대의 거리를 말한다.
대릉원 옆의 이 조용한 한옥마을에 몇 년 전부터 젊은 작가와 사업가들이 모여들어 최신 유행의 카페, 식당, 공방, 상점들을 열었다.
내남 네거리에서 옛 황남초등학교 네거리까지 이어지는 포석로를 따라 상점이 즐비하다.
황리단길을 단순히 젊은이들의 소비문화 거리로 보고 외면하는 '아재'들은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반경 1∼2㎞ 안에 대릉원, 첨성대, 월정교, 계림, 월성, 교촌마을·경주향교, 분황사, 황룡사지, 국립경주박물관, 동궁과 월지, 오릉 등 볼거리가 널렸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경주 여행은 주변에 유적지가 산재한 황리단길에서 시작해 맛집이 즐비한 이 길에서 끝낼 가능성이 크다.
십원빵으로 동심으로 세계로 돌아가 볼 수도 있다.
불국사 다보탑 무늬가 새겨진 10원 주화 모양의 십원빵은 경주에서 처음 등장해 일본에까지 '십엔빵'으로 알려지고 오백원빵, 백원빵 등 변형을 출현시켰다.
길거리 간식 '대박' 신화의 주인공인 셈이다.
주먹만 한 치즈와 단팥이 듬뿍 들어간 십원빵의 가격은 4천원 정도.
황리단길을 순례하듯 걷는 청춘들의 손에 쥐어진 십원빵의 맛에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추억이 깃들 것이다.
◇ 분황사·포석정·오릉
눈길 닿는 곳마다 천년의 유산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경주는 걷는 맛이 나는 도시이다.
시내권은 대부분 평지여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해도 그리 힘들지 않다.
분황사, 포석정, 오릉도 시내에서 쉽게 다녀올 수 있는 유적지에 속한다.
분황사는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이 특이하다.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문화재를 보는 눈이 없는 문외한도 한눈에 국보급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명작이었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3층만 남아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금강역사 조각은 신라의 예술적 기량과 웅혼한 기상에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포석정지는 '유상곡수연'의 무대, 즉 연회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유상곡수연은 물 위에 술잔을 띄운 뒤 그 술잔이 당사자 앞에 도달하기 전까지 시를 읊는 풍류놀이이다.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석 잔을 마셔야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지만,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포석정지가 유일하다.
지금 정자는 없고 돌로 만든 물길만 남아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오릉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박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가 묻힌 무덤이다.
박혁거세 탄생 설화가 깃든 우물 유적인 나정도 오릉에서 멀지 않다.
◇ 경주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작열하는 태양이 서녘 하늘로 기울 즈음 광활한 연지 사이로 난 둑길 위에 인파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동궁과 월지의 야경을 즐기러 가는 야행객들이었다.
휘황한 인공조명과 아름다움을 다투려는 듯 만개한 연꽃들이 이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아이, 연인, 친구들과 함께인 그들은 모두 외지에서 왔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많았다.
서울 시민이 남산에 올라가는 일이 드문 것처럼 관광지에 놀러 가는 경주 시민은 별로 없다고 하니 대부분 여행객일 것이다.
활짝 핀 연꽃들과,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머리가 구분되지 않는 한여름 밤의 야경은 경주에서만 누릴 수 있는 판타지일 테다.
동궁과 월지는 건물을 비추는 조명과, 그것이 연못에 반사된 풍광이 아름다워 경주의 대표 야경 명소로 꼽힌다.
첨성대, 월정교도 야행자들의 '성지'였다.
월정교는 신라 시대 경주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기 위해 지어진 나무다리이다.
조선 시대에 유실됐으나 현대 들어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교량으로 복원됐다.
문루와 교량 모두에 지붕이 씌워져 있는 월정교는 APEC 정상들의 만찬 장소로 검토됐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로 이색 명소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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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