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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불타는데 너무 춥다"…강성은 시집 '슬로우 슬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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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20년, 다섯번째 시집…참담한 현실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어느 해에는 사람들이 / 여자들의 머리채에 불을 질렀고 / 다음 해에는 여자들이 / 스스로의 머리채에 불을 질렀다 // 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 불은 여자들을 태우고 그다음 해에는 모두를 태웠다 / 그래도 꺼지지 않는다" (시 '세계가 불타는데'에서)
여성들의 머리채에 불을 지르는 폭력적인 행동은 여성뿐 아니라 모두를 태워버리고도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 수그러들지 않는다. 불탄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올해 등단 20년을 맞은 강성은(52) 시인이 폭력과 재난이 끊이지 않는 참담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다섯 번째 시집 '슬로우 슬로우'(봄날의책)를 펴냈다.
수록작 '세계가 불타는데'는 폭력이 집어삼킨 세상과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인권 탄압, 그것을 외면하는 현대인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이렇게 추운데 불이 났을 리가 없지 / 오들오들 떨며 침대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 얼음장 같은 이불을 덮는다 // 이상하게 몸이 차갑구나 / 세계가 불타는데 아직도 너무 춥구나 // 세계가 불타는데 / 세계가 불타는데" (시 '세계가 불타는데'에서)
강성은은 사회적인 사건에 영향을 받아 시를 쓴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2018년 대산문학상 수상소감으로 "세월호와 문단 내 성폭력, 두 사건이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슬로우 슬로우'에 수록된 시들에도 우리 사회가 최근 겪은 일들의 흔적이 묻어 있다. '안녕히 가세요'는 팬데믹을 직접적으로 암시하고, '피 묻은 빵'은 노동 현장에서의 참사를 연상시킨다.
"어서 오세요 /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줄을 서서 / 천막 속으로 들어간다 / 줄은 길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고 // 어서 오세요 / 재난과 안전이 번갈아 수신되고" (시 '안녕히 가세요'에서)
"피 묻은 빵을 먹는다 / 입속에 피가 고인다 / 피가 되고 / 살이 되는 / 피 묻은 빵을 먹는다 / 누군가의 죽음 / 누군가의 삶 / 배가 고프다 / 먹어도 배가 고프다" (시 '피 묻은 빵'에서)
다만 강성은의 시가 세상을 비관적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안녕히 가세요'에는 봄이 올 때가 지났는데도 봄이 오리라 믿으며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 이미 없어진 레코드 가게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등장한다.
황인찬 시인은 시집 발문에서 이런 점을 언급하며 "아무리 세계가 끔찍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세계 속에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는 바람, 그 마음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는 저 태도를 아름답다고 부르지 않을 수 없겠지"라고 썼다.
강성은은 2005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단지 조금 이상한', 'Lo-fi',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를 펴냈다.
104쪽.
jaeh@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