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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민주화 운동 맏형' 김성민 전 자유북한방송 대표 별세(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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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하채림 이충원 기자 = 20여년간 대북 라디오방송을 이끌며 한국 내 '북한 민주화 운동 맏형' 역할을 한 탈북 시인 김성민 전 자유북한방송 대표가 12일 오후 1시5분께 서울 강서구 한 병원에서 폐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자유북한방송(대표 이시영)이 전했다. 향년 63세. 고인은 2017년 3월 뇌종양 판정을 받은 뒤 한때 병세가 호전됐지만, 지난해 다시 암이 전이돼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1962년 자강도 희천시에서 서정시인 김순석(1922∼1974)의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김형직사범대 어문학부(작가 양성반 3년제)를 졸업한 뒤 1992∼1995년 북한군 예술선전대 작가(대위)로 활동하다 1995년 탈북과 1996년 재탈북을 거쳐 1999년 2월 한국에 입국했다.
KBS의 대북 방송인 '사회교육방송'에서 일하다 2003년 노무현 정부 당시 대북 방송을 전면 중단하자 일을 그만뒀다. 한국에서 2005년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07년 4월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 시를 발표했다.
2000∼2003년 백두한라회장, 2003∼2004년 탈북자동지회장을 맡아 탈북민 활동가들의 맏형 역할을 했고, 2004년 4월 대북 인터넷방송 자유북한방송을 만들어 대표로 활동했다. 처음엔 인터넷방송으로 시작했다가 2005년 12월 대북 단파방송으로 바꿨다.

기자 6명과 엔지니어 1명으로 이뤄진 방송국은 하루 두차례(오전 2시부터 30분간, 오후 7시부터 30분간) 황장엽(1923∼2010)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강좌와 탈북자 수기 등을 내보냈다. 고인이 프로그램을 제작해 수잰 숄티 디펜스포럼 대표가 이끄는 미국자유북한방송에 보내면 미국에서 영국 업체를 통해서 전 세계로 단파를 쏘는 방식으로 방송했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반제민전(구 한민전)이 방송 중단을 요구하며 폭파 위협을 하는 민감한 반응을 보일 만큼 파급력이 컸다. 고인은 2006년 6월과 2013년 10월 협박 소포와 편지, 이메일 등을 받기도 했다.
2004년부터 수잰 숄티 대표와 함께 매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북한자유주간' 행사를 공동 개최했고, 미 의회 청문회, 토론회, 각종 북한인권행사 등에 참석해 북한 주민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이들의 활동은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 여러 나라가 잇따라 북한인권법을 제정하는 밑거름이 됐다. 2023년 3월 통일부 북한인권증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시인이기도 했다. 지난 6월 자전적 시집 '병사의 자서전'을 펴냈다.
"미궁 같은 가마 속에선/한 되의 보리쌀이 버무려진다./누이의 정조와 맞바꾼 쌀이다/자식을 굶겨 죽인 아비면 어떠냐/매운 눈을 비벼가며 저녁연기를 피워 올려라./쌀을 살리자는 사람들이 있다/죽어가는 모든 것 위에 유독/쌀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시 '쌀에 대하여')
시집 속 한국은 "산에 나무가 있는 게 신기"했고 "수도꼭지를 틀면 찬물 더운물이 콸콸 나오고, 버튼만 누르면 구들이 뜨뜻해지는 게 또한 신기"한 곳이었고, "없거나, 하나뿐이어서 귀하고 소중했던 것들이 차고 넘치는 나라"이고, "우리 집 창문이 몇 개인지를 세다가 왈칵 눈물을 쏟은 적도" 있는 곳(시 '신세계')이지만, "한번 걸어 잠그면 열리질 않"고 "이웃들의 얼굴조차 모르고 살"고 "옆집에서 고성이 터져도 상관없는 일이라 외면하는" 곳이기도 했다.(시 '문')
시 '아웃사이더'에선 "이 땅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게 급선무란 생각이 드는가 하면, '남조선 사회'가 탈북자인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다시 심란해진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시 '어느 탈북자의 기도'에선 "굶어 죽은 자식 앞에서/흘리던 눈물을 채 닦아내기도 전에/사회주의 승리를 위한 전투가 강요되고/맹목적인 충성경쟁을 벌여야만 했던/암흑의 땅, 그런 북한에 비해 대한민국이/덜 살기 좋은 나라라고 우겨대는 그런 사람들 없도록 해 주소서."라고 적었고, '자유'라는 제목의 시에선 "그것 없이는 살아도 죽은 목숨인 / 숨결이며 가치인 자유는 / 고향으로 안고 갈 우리의 맹세"라고 노래했다.
공저 '북한에서 온 내 친구'(2002, 우리교육)와 '10년 후 북한'(2006, 인간사랑), 시집 '고향의 노래는 늘 슬픈가'(2004, 다시)를 펴냈다.
프랑스 국경없는기자회 '올해의 매체상'(2008), 대만 민주주의기금 '아시아 민주인권상'(2009), 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 '북한인권상'(2019), 국민훈장 동백장(2024)을 받았다. 북한이탈주민으로서 탈북민 정착 지원 공로로 훈장을 받은 것은 고인이 처음이다. 1995년 문명옥씨와 결혼해 딸 김예림씨를 뒀다. 빈소는 이대서울병원 특1호실에 마련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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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