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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은 효녀 아닌 사회적 약자…억울한 이들의 목소리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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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 연출가 요나 김, 국립창극단 신작 '심청' 연출
전통과 현대의 만남 시도…라이브 카메라·입체 공간 연출로 새 감각 선사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심청은 단순히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는 효녀가 아니라, 억압받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모든 약자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 연출가 요나 김은 12일 연합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국립창극단 신작 '심청'을 연출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그는 전통 '심청가'를 과감히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효녀 심청'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사회적 약자와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무대를 선보였다.
지난달 13~14일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작으로 초연된 뒤 지난 3~6일 국립극장에서 전석 매진되며 시공을 초월한 파격적 해석을 담은 대작으로 평가받으며 반향을 일으켰다. 국립창극단 모든 단원을 포함해 무용수·합창단 등 150명에 달하는 대규모 출연진이 깊은 울림을 줬다.
요나 김은 극본을 직접 쓰며 "심청의 이야기를 단순한 판소리가 아니라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위한 진혼곡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대에서 연극학과 철학 등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독일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만하임·슈투트가르트 국립극장 등 유럽 주요 무대에서 연출가이자 대본가로 활동했다.
2014년 창작오페라 '악령'은 세계적인 오페라 전문지 오펀벨트(Opernwelt)에서 올해의 최우수 창작극으로 선정됐다. 2017년 만하임 국립극장에서 연출한 슈만의 오페라 '게노베바'로 오펀벨트 '올해의 연출가'로 꼽혔으며, '카르멘'으로 2020년 독일 최고 권위 예술상인 파우스트 최우수 오페라 연출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요나 김은 모국에서 관객들과 소통한 이번 작업을 "예술가로서의 귀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정체성의 경계에 서게 되는데, 그 경계에서 오히려 더 잘 보일 때가 있다"며 "한국 전통 창극을 연출한다는 건 유럽 무대 경험을 바탕으로 판소리의 보편적 힘을 새롭게 드러내는 도전"이라고 말했다.
요나 김은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을 단순한 효심의 상징이 아닌, "사회가 가장 약한 존재를 희생시켜 양심의 불편함을 덮어버리는 '구조적 폭력'"으로 해석했다.
심 봉사 역시 전통적 해석과 달리 무능하고 무책임한 인물로 그려졌다. 그는 "심 봉사의 눈먼 상태는 단순한 장애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현실을 외면하는 맹목의 은유"라며 "그가 눈을 뜬 것은 너무 늦게 깨달은 자들의 비극적 자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뺑덕어멈은 익살스러운 시골 아낙이 아니라 영리하게 생존하는 인물로, 승상 댁 부인은 아들만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한국 어머니들의 극단적 초상으로 재해석됐다. 김 연출가는 "이런 인물들을 통해 사회가 얼마나 반복적으로 약자를 방치하는지를 드러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심청'의 또 다른 특징은 공간 연출이다. 그는 "전통적인 무대의 '제4의 벽'을 파괴하고 싶었다"며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극장 전체를 하나의 무대로 확장했다"고 강조했다. 실제 관객석 뒤에서 출연자들이 무대를 향해 들어오고 심청이 극 중 극장 밖으로 나가는 연출을 통해 공간감을 더 확장해 입체적으로 무대를 사용했다. 그는 "독일 무대미술가와 협업해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공간을 구현하고자 했다"고 소개했다.
독일에서 선보였던 라이브 카메라를 도입한 것도 주목받았다. 관객석 위치나 거리에 따른 시야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평가다. 그는 "카메라는 돋보기처럼 다양한 앵글에서 '입체적인 느낌'을 제공해 관객을 인물들의 내면으로 끌어들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리꾼들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클로즈업 효과가 극대화되었다"고 평가했다.

요나 김은 이번 작품의 궁극적 지향에 대해 들뢰즈와 파울 클레의 말을 빌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 며 "심청은 수많은 이름 없는 딸들의 또 다른 얼굴이며, 무대는 그들을 위한 진혼곡의 공간"이라고 했다.
"진혼곡이 끝나면 심청은 담담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약자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내는 연극의 힘이자 예술의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향후 창극 연출 계획에 대해 그는 "흥부가나 춘향가 등의 작품이 찾아오면 받아들여야죠"라며 제2, 제3의 '심청'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phyeonsoo@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