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빼앗아도 건드리면 안 될 두 가지, 밥그릇과 언론자유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많은 피를 흘린 끝에 정권이 붕괴한 네팔 사태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제를 다시 입증했다. 결국 인간은 앞사람 또는 옆 사람이 했던 실기를 이미 봤거나 비판했으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게 본능이자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고장 난 영사기에서 끝없이 되풀이돼 상영되는 듯한 클리셰는 다음과 같다.
자신만 절대선이라 주장했던 사람들이 혁명이나 민란으로 권력을 잡는다. → 지배층이 되면 소수 기득권이 돼 권력을 장기간 나눠 먹는다. → 국민 삶이 피폐해져도 무신경하게 부정부패를 일삼는다. → 약속했던 개혁 조치는 권력 쟁취를 위한 감언이설이었음이 결과적으로 드러난다 →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 → 위선에 분노한 민중이 봉기한다 → 진압 과정에서 많은 이가 죽거나 다친다 → 정권이 무너진다.
현대사로만 범위를 좁혀도 많은 개발국이 이런 절차를 밟았거나 반복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왕정이 종식되거나 체제가 바뀐 나라에서 이런 사례가 많다. 사회주의 정권이 적지 않은 나라에서 수립될 수 있었던 건 부의 평등이 가능하다는 유토피아를 약속해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혁명 이후엔 지배층과 다수 민중의 빈부 격차가 더 극심히 벌어졌다. 소련,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이번 네팔 사태도 여지 없이 이런 패턴을 보였다. 네팔 왕국을 무너뜨린 좌파 혁명 세력은 인민공화국 수립 후 몇 개 정파가 이합집산하며 20년 가까이 권력과 부를 독점했다. 심지어 왕당파와 혁명 세력조차 손잡고 뒤섞일 만큼 권력층끼리 뭉쳤다. 공약했던 내전 과거사 해결, 개헌, 관광 부국 도약, 부패 척결 등은 대부분 이행되지 않았다. 국민의 고통이 커지는 동안 소수 권력층은 자제들까지 권력과 부를 축적했고 호화로운 생활로 다수 국민의 불만을 키웠다.
특히 혁명 지지 세력의 배신감이 컸다. 이들은 전제 군주를 타도해 모두 잘 살게 해주겠다던 마오주의 공산당을 내전도 불사하며 도왔다. 인민파와 왕당파가 10년간 싸우는 동안 1만7천명 넘게 죽고 수십만 명이 집과 재산을 잃었다. 그런데 오히려 네팔은 이후 더 가난해져 세계 최빈국 그룹으로 전락했고 혁명 세력만 배를 불리니 반감이 생겼다. 특히 젊은이들의 상실감과 위화감이 엄청났다. 빈부 격차와 청년 실업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서다. 이번 사태를 Z세대가 주도한 이유다. 카트만두 힐튼 호텔이 불에 탄 큰 이유도 권력층 자제를 뜻하는 '네포 키즈'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치를 과시하는 상징적 장소여서다.
이처럼 분노가 치솟던 와중에 소셜미디어를 차단해 언로(言路)마저 막은 게 사태 촉발의 불씨를 댕겼다. 허위 정보를 불허한다는 이유였지만 사실 청년들이 소셜미디어에서 네포 키즈의 행태를 비난하는 움직임이 일자 이를 막으려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진 게 거의 없어 오직 말로 호소하는 것만 남은 사람에게서 말할 자유마저 빼앗는 건 극단적 행동을 부른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달려든다. 정부가 언론 자유마저 빼앗은 건 안 그래도 울고 싶던 청년들의 뺨을 때린 격이었다.
또 하나 큰 실기는 소셜미디어가 단순히 젊은이들이 잡담하고 동영상을 즐기는 도구가 아니란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실업률이 높으니 많은 청장년이 해외로 나가 일하며 가족에 돈을 보낸다. 네팔 국민 3분의 1가량이 해외 근로자가 보내오는 돈에 의지해 산다고 한다. 그런데 메신저 앱 등을 막으니 해외에 나간 가족과 연락할 길이 없어졌다. 당장 생계에 지장이 생긴 것이다. 해외에 취업하려는 청년들은 동영상 메신저 등을 통해 영상 면접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이처럼 생계와 취업마저 차질을 빚었으니 그들이 거리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던 심정이 이해된다.
세계 각국 통치자들은 이번 네팔 사태를 통해 교훈을 얻었을 듯하다. 설사 만에 하나 국민을 억압하더라도 최소한 다음 두 가지는 피해야 권력이 위태로워지는 사태는 피할 수 있다는 가르침 말이다. 첫째, 의견이 다르더라도, 상대가 밉더라도 언론 자유(freedom of speech)는 억압하지 말 것, 둘째, 다 빼앗더라도 남의 소중한 밥그릇은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하나는 남겨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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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