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가자 평화 정상회의…트럼프 평화 치적 홍보 독무대로 변질
정상들 병풍처럼 세우고 "왜 섰는진 모르지만 연설은 짧게" 농담도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유현민 특파원 = 지난 13일(현지시간) 이집트의 홍해 휴양지 샤름엘셰이크에서 열린 가자 평화 정상회의는 중동의 분쟁사에 한 획을 그은 자리였다. 2년 넘게 이어진 가자지구 전쟁의 총성이 멎고 인질 석방이 시작됐다. 그러나 중동 평화의 역사적 현장은 이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독무대로 바뀌었다.
    회의는 예정보다 3시간가량 지연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스라엘 크네세트(의회) 연설이 예상보다 길어지며 일정이 꼬였기 때문이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20여 개국 정상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한 세계 지도자 30여명이 3시간 넘게 대기해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크네세트 연설에서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강대국과 부국의 정상들이 이집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며 "좀 늦어졌는데 가서 아직 기다리고 있는지 봐야겠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시작부터 '트럼프의 시간'으로 움직인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 휴전 중재는 물론 대단한 성과임이 분명하다. 이집트, 카타르, 튀르키예 등 중재국과 함께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총성을 멈추게 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의 스포트라이트는 '트럼프'에게 향했다. 중재국인 미국과 이집트, 카타르, 튀르키예 정상이 서명한 '가자평화선언'으로 알려진 문서의 이름도 '지속적인 평화와 번영을 위한 트럼프 선언'(Trump Declaration for Enduring Peace and Prosperity)이었다. 중동 평화 문서가 한 개인의 이름으로 장식된 것은 이례적이다. 선언문의 서두 역시 '우리는 트럼프 평화협정을 전폭 지지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미국 외교사에서도 특정 대통령의 이름을 평화 선언 전면에 내세운 경우는 거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진 연설에서 "우리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며 자신을 '평화의 주역'으로 내세웠다. 그러고는 연단 위에서 마치 진행자처럼 각국 정상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내 친구", "돈이 많은 남자", "아름다운 여성" 등 품평을 했다. 특히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를 향해 "미국에서 여성에 대해 '아름답다'는 단어를 쓰면 정치 인생은 끝나지만, 나는 해보겠다"면서 "당신은 아름다우니까"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저자세 외교'로 유명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은 어디 있나"라고 부르자 보좌관처럼 재빨리 다가가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국제 정상외교의 무대가 순식간에 '트럼프 쇼'로 변한 장면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합의"라는 자화자찬을 늘어놓으며 연설하는 동안 뒤편에는 다른 정상들이 병풍처럼 늘어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국가의 지도자들"이라며 "그들이 왜 서 있기로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설을) 짧게 하겠다고 약속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세계 주요국 정상과 지도자들은 조연처럼 배경에 머물렀고, 트럼프 대통령은 중심에서 '평화'를 연출했다. 물론 이런 연출은 단순한 과시가 아니라 미국 내 지지층을 향한 정치적 메시지로도 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자 휴전 합의를 발판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을 다시 노리는 모양새다.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가 "가장 훌륭한 후보인"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말하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단에서 "노르웨이는 어디 있나"라고 연신 찾는 장면에서는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 실패에 대한 앙금이 묻어났다. 그는 평화의 과정마저 자기 홍보의 무대로 만들었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희생자들, 인질과 가족들의 고통, 팔레스타인 민중의 절규는 그의 화려한 무대에 설 자리가 없었다. 남은 것은 '트럼프가 평화를 가져왔다'는 한 문장이었다.
    29∼30일 방한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잇달아 '러브콜'을 보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남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성사됐더라면 가자 평화 정상회의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피스메이커' 이미지 구축에는 큰 도움이 됐을 터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북한의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실질적인 진전을 보기는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가자 평화 정상회의에서 본 장면은 외교가 얼마나 쉽게 '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국제 무대에서의 '쇼맨십'은 일시적 스포트라이트를 얻을 수 있지만, 진정한 평화는 무대 뒤에서 쌓이는 신뢰를 토대로만 가능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한 이재명 대통령이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hyunmin623@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