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고추가 너무 예뻐요. 쑥쑥 자라려면 물을 줘야겠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빨갛게 익은 고추를 연신 어루만지던 나율(6)양의 눈망울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지난 13일 부산 부산진구 당감동에 마련된 '제비마을 텃밭'.
갈색 화분이 곳곳에 놓인 텃밭에는 겨울인데도 상추와 깻잎이 먹음직스럽게 자라 있었고, 일부는 이제 막 씨앗을 틔운 상태였다.
최근 나율양은 유치원이 끝난 뒤 엄마, 9살 언니와 함께 매일 이곳에 들러 하루 사이 배추와 고추가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한다.
자매의 엄마 구수연(45)씨는 "가족 중 시골에 사는 분이 없어 아이들이 흙을 만질 경험이 적었는데 이렇게 텃밭을 가꾸니 좋다"며 "가족이 함께 가꾸는 이곳이 아이들에게 자연을 배울 수 있는 교실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이 직접 물을 주기도 하는데 어서 수확의 기쁨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금 이처럼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텃밭 부지는 불과 1년 전만 해도 주민 사이에서 '쓰레기 집'으로 통하던 곳이었다.
집주인은 있었지만,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버린 쓰레기가 거대한 산을 이뤘고 그 무게에 담이 무너질 뻔한 적도 있었다.
한 주민은 "근처에 시장이 있어 유동 인구가 많은 길목인데 유독 담이 낮아 쓰레기를 버리는 행인이 많은 데다가 여름마다 악취도 심해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고 말했다.
박정훈 주민 대표는 "이 동네는 한국전쟁 피난민과 인근의 대형 신발 공장 노동자가 머무르면서 북적이던 곳"이라며 "그러나 신발공장이 하나둘씩 떠나가면서 인구가 줄었고 도심이 텅 비게 되는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길목에 있는 집도 대부분 비어 있는데 안쪽에는 얼마나 사람이 없겠느냐"고 덧붙였다.
이에 부산진구는 지난해 11월 '쓰레기 집'으로 통하던 빈집의 주인을 찾아 동의 절차를 거친 후 집을 철거했다.
이 부지를 활용해 주민이 직접 분양받아 관리할 수 있는 텃밭을 지난 7월 조성했다.
1천만원을 들여 식물 종자와 식물을 기를 수 있는 박스 등 시설을 설치했다.
이어 당감동 주민 대표를 중심으로 텃밭 가꾸기에 참여할 주민 10가구를 모았다.
상추, 오이, 방울토마토, 가지 등 심는 작물도 다양했다.
박정훈 대표는 "주민들이 제비뽑기로 사용할 텃밭의 위치를 정해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각자 심고 싶은 작물을 열심히 기르고 있다"고 말했다.
텃밭이 조성되면서 조용하던 마을은 활기를 되찾았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도 이곳을 방문하면서 '사람 사는 동네'로 거듭났다.
텃밭을 매개로 생긴 작은 커뮤니티에서 대화하는 등 소통하는 이들도 늘었다.
가족이 수확한 작물로 맛있는 요리를 해 먹었다는 인증사진을 올리는 것은 물론이다.
수경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빗물을 받아 쓰거나 물을 가져와야 하는데 직접 페트병에 담아온 물로 모든 텃밭에 물을 줬다며 공지를 올린 주민도 있다.
나름의 관리 규칙도 만들었다.
참가비 5만원을 보증금으로 내고, 식물을 2번 이상 죽이거나 관리하지 않을 경우 이를 돌려주지 않는다는 규정이다.
박 대표는 "주민들이 작물을 돌보기 위해 이곳에 자주 오다 보니 안부를 주고받고 소통하는 '사랑방'이 됐다"며 "사람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레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마을 인근에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오히려 소통은 더 단절된 상황"이라며 "새로운 사람들은 유입되지만, 이웃 간에는 멀어지는 문제를 해소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진구는 지역 주민 만족도가 높은 만큼 해당 사업을 꾸준히 확대 추진할 계획이다.
내년에는 초등학교 등 교육기관 인근 빈집을 우선 철거해 해당 부지를 도심 속 농사체험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부산진구 관계자는 "이 사업이 지역 주민의 여가 생활을 증진하고,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는 만큼 활성화해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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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