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정빛 기자] 지금 시대에 '젊은 예술가가 무대에서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제46회 청룡영화상 축하공연을 보여주면 될 것 같다. 영화와 음악, 아이돌과 보컬리스트가 한 무대 안에서 뒤섞이며, 올 한 해의 장면과 마음을 다시 꺼내 든 밤이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2년 연속 청룡 무대에 오른 이찬혁, 영화 '어쩔수가없다'와 완벽히 겹쳐진 라포엠, 하트로 2부의 도어(문)을 연 보이넥스트도어, 박정민과 마지막 여운을 남긴 화사가 있었다.
▶'천재 아티스트' 이찬혁의 청룡 퍼스널컬러
이찬혁이 올해도 청룡의 심장을 열었다. 작년 샴페인을 들고 '관짝 엔딩'을 남기며 청룡 브랜드 도장 찍었던 이찬혁은 올해는 '멸종위기사랑'과 '비비드라라러브'를 오롯이 청룡을 위해 다시 빚은 편곡으로 무대를 채웠다. 사실상 자신의 올해 마지막 무대를 이곳에 던져 넣은 셈. 그만큼 퍼포먼스는 더 단단했고, 더 필사적이었고, 더 '천재 아티스트 같다'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사랑이 멸종 위기에 놓인 시대'라는 메시지는 비유를 넘어 무대에서 실제 움직임으로 살아났다. 서로 다른 몸과 개성을 지닌 퍼포머들이 한 공간을 공유하며 자유롭게 리듬을 타다가도, 같은 박자로 맞춰 흔들고 같은 방향을 향해 춤을 췄다.
'사랑의 종말론'이라는 가사가 순간적으로 '사랑해 정말로'로 들리는 것처럼, 다양성과 소수성을 품은 여러 존재들이 함께 사랑을 확장시키는 장면이었다.
후반, 이찬혁이 힘을 빼고 쓰러지자마자 댄서들이 동시에 손을 뻗는 순간, 무대는 어떤 은유보다 정확했다. '사랑을 잃어가는 시대'에 기댈 수 있는 건 결국 사람뿐이라는 메시지. 대사도 설명도 없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들'이라는 원초적 장면으로 직진했다. 몸의 움직임만으로 더 큰 이야기로 확장된 것이다. 이 자체가 시네마틱, 청룡이라는 축제와 닿아졌다.
무엇보다 기획사가 짜준 틀 안에서 개성을 감춘 채 노래하고 춤추는 무대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아, 진짜 아티스트란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일깨울 수 있었다. 사실 가요계에서 '천재'라는 표현이 흔히 쓰이지만, 이찬혁 앞에서는 굳이 단어를 아낄 필요가 없어 보인다.
▶라포엠-'어쩔수가없다', 또 한 번 청룡 울린 OST의 힘
두 번째 무대는 스태프상 중 음악상 시상이 끝나자마자 바로 열렸다. 마침 그 음악상을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조영욱 음악감독이 수상했고, 시상 직후 곧바로 '어쩔수가없다' OST로 공연이 이어지면서 청룡만이 만들 수 있는 '완벽한 흐름'이 완성됐다. 시상과 공연이 하나의 서사처럼 자연스레 맞물린 셈이다.
무대의 첫 장면은 '어쩔수가없다'에서 딸 수리로 열연한 최소율의 첼로였다. 극 중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수리는 첼로에 집착하면서도 가족에게는 좀처럼 연주를 들려주지 않는데, 영화 말미에 마침내 완전한 연주를 들려주는 그 장면이 이날 다시 펼쳐졌다. 최소율은 이번 공연을 위해 오랜 시간 연습을 거듭했다는 후문. 객석의 '어쩔수가없다' 팀도 숨죽여 지켜봤고, 엄마 역의 손예진은 직접 휴대전화를 들어 촬영하며 그 순간을 기록했다.
최소율의 첼로가 움직임을 열었다면, 그 다음은 라포엠의 호흡이 감정을 채웠다. 순백의 턱시도를 갖춰 입은 라포엠이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첫 소절을 열자마자, KBS홀의 공기가 바뀌었다.
라포엠은 영화의 시그널 음악이기도 한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를 자신들만의 결로 다시 녹여냈다. 영화 속, 숨 막히는 음악감상실 대치 장면에 아이러니한 긴장감을 얹었던 그 노래가 청룡 무대에서는 전혀 다른 감정의 층위로 쌓아 올려진 것이다. 크로스오버 특유의 탄력적인 보컬과 선형적 하모니가 더해지자, 그 장면의 주역 염혜란과 이성민도 객석에서 미소를 지으며 지켜봤다. 이날 6관왕에 빛나는 '어쩔수가없다'와 완벽히 포개진 듯했다.
특히 라포엠과 청룡의 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2년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OST '안개' 무대로 탕웨이의 마음을 울렸던 그들이 올해는 또 한 번 박찬욱의 세계관과 맞물린 작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안개'로 한 번, '고추잠자리'로 또 한 번. 라포엠이 영화의 감정 곡선을 무대로 다시 읽어내는 팀이라는 걸 스스로 입증했다.
▶'헐리우드 액션'의 개막…보이넥스트도어, 배우들과 하트 터뜨린 '지코의 아이돌'
2부의 도어(문)은 보이넥스트도어가 열었다. 먼저 신곡 '헐리우드 액션' 무대를 선보였는데, '헐리우드 액션'이라는 곡 자체가 청룡영화상과 찰떡으로 어울렸다는 점이 관심사다.
레드카펫을 걷는 멤버들의 VCR, 세계 최대 영화 도시의 상징을 재치 있게 비튼 곡, 극장처럼 꾸민 무대 세트 등 말 그대로 '헐리우드 액션'을 치는 듯한 유쾌한 연출이었다. 아이돌이 영화 시상식의 분위기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상식이 아이돌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특히 시상식 특유의 격식 위에, 유머를 얹으면서도 무대 완성도를 잃지 않는 팀의 균형감이 돋보였다. 사실 아이돌에게 청룡 무대는 난도 높은 무대로 꼽힌다. 배우들로 가득 찬 객석, 생방송 특유의 긴장감, 격한 안무 속에서의 생라이브까지. 그 어떤 것도 쉬운 조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보이넥스트도어는 모든 변수를 끌어안은 채, 핸드마이크로 흔들림 없는 'CD 삼킨 라이브'를 소화해냈다.
또 5세대 보이그룹 특유의 밝은 에너지와 '청룡 맞춤형' 콘셉트를 정확히 꿰뚫기도 했다. 청룡을 이미 들썩이게 한 지코의 아이들답게, 현장을 '어떻게' 흔들고 '어디까지' 끌어올려야 하는지를 아는 팀이었다. 청룡에서 "메이크 썸 노이즈"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외칠 수 있는 아이돌이 또 있을까.
특히 히트곡 '오늘만 아이 러브 유' 시작 전, "'아이 러브 유' 라는 가사에 맞춰, 하트 포즈를 해달라"는 '전지적 청룡 시점' 미션을 주면서, 분위기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 이를 위해 MC 이제훈의 '하트 7종 세트'가 예시로 공개됐고, 객석 곳곳에서도 배우들이 하트 포즈를 따라 취하며 무대를 즐겼다. 멤버들도 MC 한지민, 이제훈 곁으로 직접 다가가 챌린지를 유도, MC들과 각종 하트를 만들며 '사랑스러운 청룡의 밤'을 완성해냈다.
▶축하공연에서 영화 찍고 간 화사-박정민, '굿 굿바이'로 완성한 청룡의 마지막 여운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최우수작품상만을 남겨두고, 시상식의 감정선을 정점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타이밍. 대망의 마지막 축하무대는 화사가 맡았다.
화사는 2016년, 2017년 마마무로 청룡영화상 무대에 오른 데, 이어 2023년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는 솔로로 축하공연을 꾸미는 등 청룡과 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는 기존 히트곡들보다, 신곡 '굿 굿바이' 하나에 집중하는 선택을 했다. "이번엔 이 노래의 감정에만 온전히 무게를 싣고 싶다"는 화사의 뜻이 반영된 무대였다.
연출 역시 단출했다. 거창한 장치 없이 의자 하나만 있는 심플한 구성이었다. 대신 한층 더 깊어진 화사의 보이스를 전면에 세웠다. 화사가 의자에 앉아 청룡 객석을 바라보며 '굿 굿바이'를 부르는 동안, 노래는 이별이 아니라, 곡 제목처럼 '좋은 안녕'이라는 '잘 보낸 시간에 대한 예의'처럼 들렸다. 슬프지만 담담하고, 뜨겁지만 시원한, 묘하게 뒤섞인 감정이 KBS홀을 천천히 채웠다.
특히 뮤직비디오에 함께 출연했던 박정민이 남우조연상과 남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만큼, 그의 반응에도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다. 결국 무대 후반, 화사가 객석으로 내려가자, 박정민 또한 화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 채 자리를 바꾸더니, 마치 즉흥적으로 완성된 '라스트 댄스'를 췄다.
뮤직비디오의 여운이 현실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단 한 곡이었지만, 잠깐의 동작, 손짓, 눈빛만으로 한 편의 영화가 됐다. 화사와 박정민 모두 스크린 바깥에서 또 하나의 필모그래피를 쌓아 올린 셈이다.
과장되지 않은 고백이었기에 더 오래 남는 무대. 청룡의 밤을 마무리한 마지막 한 곡, '굿 굿바이', 다시 말해 '좋은 안녕'이 관객들에게 가장 늦게까지 남는 여운을 선물했다.
정빛 기자 rightlight@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