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퓨전 국악 밴드 '이날치'가 2020년 5월 발표한 노래 '범 내려온다'의 가사다.
이 노래가 지난 13일 치러진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응시자들을 고뇌에 빠트렸다.
국어 18~21번 문항의 지문에 등장한 판소리 '수궁가' 속 장면을 읽은 수험생들 사이에서 '범 내려온다'가 연상돼 문제 풀이에 방해됐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범 내려온다'가 올해의 '수능금지곡'이 된 셈이다.
인터넷에는 "출제자가 노렸네 노렸어"(네이버 이용자 'kk2***')·"수능금지곡이 수능 지문에 나오다니"('nal***') 등 성토(?)가 이어졌다.
수능·모의고사 등 시험 문제를 풀다 머릿속으로 중독성 있는 후렴이 반복해 떠오르며 집중을 방해하는 소위 '수능금지곡'은 매년 수험생들의 난제다.
지난해 2025 수능 국어영역 공통과목인 독서에서는 10~13번 지문에 단어 '노이즈'가 40번 이상 반복되며 '아파트'(APT.)가 소환됐다. 가수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노래 '아파트'(APT.)에서 반복되는 가사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가 연상된다는 것이다. 노래 '아파트'에는 '아파트'가 약 60차례 반복된다.
작년 10월 발표된 '아파트'는 유튜브에 공개된 뮤직비디오가 21일 기준 조회수 21억 회를 기록한 세계적 히트작이다. 미국과 영국 음악차트를 강타하더니 올해 미국 그래미 어워즈의 본상인 '송 오브 더 이어'와 '레코드 오브 더 이어'를 포함한 3개 부문 후보에까지 올랐다.
엑스(X·구 트위터) 이용자 'bel***'는 "정말 다시 봐도 어지럽다"며 "반복이 아파트 뺨칠 정도다. 그냥 이제 노이즈로 노래 내자"고 썼다.
"꿈에 나올까 무섭다. 노이로제 걸릴듯"(인스타그램 이용자 pec***)·"영어영역에서는 아파트로 시작하는 문장을 보고 머리에서 노래가 자동재생됐다"(엑스 이용자 'Ll1***') 등의 의견도 있었다.
2020년 고등학교 3학년 대상 6월 모의평가 국어 영역 41~45번 지문에 등장한 최동훈 감독의 영화 '전우치'의 시나리오도 '자동재생'의 피해자를 양산했다.
영화 초반 전우치가 옥황상제의 아들로 위장해 궁궐에 등장하는 부분인데, 전우치는 손가락을 튕겨 악사들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도록 만들고는 바람을 불게 하고 비를 내리게 하는 등 도술을 선보이며 정체를 밝힌다.
당시 수험생들은 문제를 푸는 내내 중독성 있는 영화음악 '궁중악사'와 주연배우 강동원의 대사가 머릿속으로 들리는 듯했다고 토로했다. '궁중악사'의 작곡가는 올해 수능서 '범 내려온다'로 다시 화제가 된 밴드 이날치의 리더 장영규다.
유튜브에는 영화 속 이 대목만 짧게 자른 영상이 '강동원 궁중악사(얼쑤얼쑤 하는거)'라는 이름으로 2017년 게시돼 현재 누적 조회수 약 690만회를 기록하고 있다.
"저 지문을 읽을 때 머릿속에 음악과 강동원 연기가 다 생각났다. 그래서 결국 절반도 안 읽고 넘어갔다"('건***'), "지문 속 '나를 아는가'라는 대사를 보고 '쿵짝쿵짝' 하는 음악이 떠올랐다. 거의 '링딩동' 급이었다"('한***') 등의 댓글이 달렸다.
수능금지곡의 '원조'는 지금까지도 회자하고 있다.
그룹 SS501(더블에스501) 유닛 SS301의 대표 히트곡 '유 알 맨'(U R Man)은 소위 '암욜맨'으로 불린다. 후렴구에서 반복되는 '아임 유어 맨, 따라다따 그대여'가 귀에서 떠나가질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2008년 발표 당시에도 공중파·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음악 방송에서 1위를 차지하며 인기를 끈 이 곡은 지금까지도 수능금지곡을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는다.
유튜브 '1theK'(@1theK)에 2019년 5월 게시돼 약 396만 조회수를 기록 중인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에는 곡 발표로부터 17년이 지난 올해 수능 전날에도 "내일 수능이래서 놀러옴"('시골***')·"수능 때마다 찾아오는 곡 TOP2 암욜맨·링딩동"(유튜브 이용자 'kim***') 등의 댓글이 달렸다.
그룹 샤이니가 2009년 발표한 '링딩동'도 '링딩동 링딩동 링디기디기딩딩 링딩동'을 반복하는 하이라이트 부분의 중독성으로 수능금지곡 반열에 올랐다.
"수능날 생각나는 그놈의 링딩동"(유튜브 이용자 '리***'), "수능 최저를 맞추고 듣는 링딩동은 짜릿하다"('hih***') 등의 댓글이 올해 수능을 앞두고도 달렸다.
MBC 유튜브 채널 'MBCkpop'(@MBCkpop)이 2017년 1월 게시해 누적 조회수 약 580만회를 기록한 '샤이니 - 링딩동, MBC 뮤직 페스티벌 20161231'에는 수험생의 공감을 이끄는 재치 있는 댓글들이 달렸다.
누리꾼 '승리에***'는 문학 지문 분석을 패러디해 "제목 링딩동, 시적화자 샤이니, 형식 수능금지곡 4음보"라며 "특징으로는 '링딩동 링딩동 링디기디 딩딩딩'의 완벽한 4음보를 이루고 있다"고 댓글을 달아 '좋아요' 약 2천개를 받았다. "수능 금지곡이 아니라 수능 치기 전까지 금지해야 한다"('잉이***')는 댓글도 있다.
이외에도 슈퍼주니어가 2009년 발표한 '쏘리 쏘리', 싸이의 2012년 메가히트작 '강남스타일', 'EXID'가 2014년 발표한 '위아래', 김연자의 2013년 곡 '아모르파티', 비비가 작년에 내놓은 '밤양갱' 등 짧고 따라 부르기 쉬운 후렴구나 비트가 반복되는 노래들도 대표적인 수능금지곡이다.
가요만이 아니다.
2015년 공개된 핑크퐁의 동요 '상어가족'도 '뚜루루뚜루'가 반복되는 후렴구가 중독성을 불러일으킨다.
'초등학생 금지곡'도 있다. 2018년 그룹 '아이콘'(IKON)의 '사랑을 했다'가 초등학생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아이들의 떼창으로 수업 진행이 어려워지자, 일부 초등학교 교실에서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수능금지곡이 히트곡의 동의어가 되면서 가수들도 노래를 발표하면서 공공연하게 "수능금지곡을 노린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한다.
지난달 29일 개봉한 영화 '퍼스트 라이드'는 배급사인 쇼박스의 유튜브 채널(@SHOWBOXmovie)을 통해 주연배우들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르는 영상을 공개했는데, 제목을 '[퍼스트 라이드] 수능금지곡 예고편 공개'라고 붙였다.
이러한 수능 금지곡을 모아놓은 플레이리스트도 다양하게 올라와 있다.
그중 'MBCkpop'은 '※수험생 주의※ 수능금지곡 2019 TOP20 무대 모음'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2019년 8월 게시해 조회수 190만여회를 기록했다. 이 영상에는 '링딩동', 'U R man'과 함께 레드벨벳의 '덤덤'(dumb dumb), 블랙핑크의 '뚜두뚜두' 등 중독성 있는 후렴을 가진 노래 20곡 담겼다.
"최종보스 'U R Man'의 아성은 아직 안 깨졌구나, 이 도돌이표 노래"('박***'), "이 노래를 들으셨다면 축하한다, 내년 시험장에서 뵙겠다"('CE***') 등의 댓글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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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