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김영록 기자] "부산 아닌 곳에서 선수로 뛸 생각은 없었다. 롯데 자이언츠와 재계약이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이상, 은퇴하기로 마음먹은지는 좀 됐다."
아쉬움이 가득하지만 후회는 없다. 롯데 유니폼을 벗는 정훈의 진심이다.
정훈은 2025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롯데에서만 16년, 사실상 원클럽맨으로 보낸 야구인생을 차분하게 돌아봤다. '오 정훈, 자이언츠 정훈'은 부산 야구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응원가 중 하나였다.
"부산 땅을 처음 밟을 때만 해도, 여기서 16년을 뛸 줄은 생각도 못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실 난 잘한 날보다 못한 날이 더 많은 선수인데, 이룬 것에 비해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마음 감사히, 평생 잊지 않겠다."
한 팀에서 오래 뛴 선수치고 이렇게 파란만장한 인생도 드물다. 현대 유니콘스 신고선수로 프로에 입문한 건 2006년. 하지만 단 1년만에 방출됐다.
군 복무를 마치고, 양덕초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활동하던 2009년 '롯데에서 신고선수를 뽑는다'는 지인의 말에 도전했다. 당시만 해도 야구인생의 남은 미련을 털어내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그렇게 부산에서의 뜨거운 야구 인생이 시작됐다.
정훈은 초등학교 코치직을 내던지고 신고선수라는 불안한 입지에 도전한 이유에 대해 "그땐 어렸으니까"라며 멋쩍게 웃었다. 마산 출신인 그에게 당시 롯데는 연고팀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군대를 빨리 다녀온 게 잘한 일이었다. 주위에서 '한번 더 도전해보라'는 권유가 많았다. 그땐 진짜 1군 1타석이 목표였다. '어차피 못하면 또 잘릴 거, 죽도록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본인 말마따나 물밑에서 끊임 없는 '발버둥'이 보답을 받았다. 정훈은 자신의 야구 인생에 대해 "부진한 선수가 있으면 그 다음날부터 그 포지션을 연습했다. 감독님이 나가라면 어느 포지션이든 평균 정도의 수비는 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했다. 오래 뛸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2013~2016년에는 주전 2루수로 뛰었다. 이후 1루수로 전향했지만, 팀이 필요로 하면 외야도 마다하지 않았다. 2024년에는 37세 노장임에도 3루와 좌익수로도 나섰다.
2015, 2018년에는 타율 3할, 2020~2021년에는 두자릿수 홈런을 쳤다. 젊을 때는 두자릿수 도루를 기록할 만큼 발도 빨랐다. 나이가 들면서 몸놀림은 조금 느려졌지만, 경험에서 나오는 주루와 수비, 노림수에서 나오는 한방은 여전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묻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정훈은 고민 끝에 2020년을 꼽았다.
"처음 주전 2루수로 도약한 시즌도 물론 기억나지만, 2019년에 야구를 그만둘 뻔했다. 야구인생 최대 위기였고, 부상까지 겹쳤던 시즌이다. 당시 허문회 감독님께서 주신 기회를 잘 잡았다. 덕분에 FA 계약까지 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참 힘들 때마다 날 도와주신 분들이 있었다."
서른을 넘기면서 오히려 야구에 눈을 떴다. 2020년 7월 28일 부산 NC 다이노스전에선 데뷔 첫 끝내기 홈런(롯데 11대9 승)도 쏘아올렸다. 지금까지도 정훈 하면 떠오르는 클러치 히터, 쏠쏠한 한방을 갖춘 베테랑의 면모가 드러났다.
하지만 올해 부진은 너무 깊었다. 타율 2할1푼6리에 2홈런, OPS(출루율+장타율) 0.576에 그쳤다. 시즌 종료 후 롯데 구단은 정훈에게 재계약 불가를 통보했다.
지금 당장 코치를 하기보단 시간을 갖고 야구를 다시 배우고 싶은 게 정훈의 진심이다. 그는 "아직 코치를 하기엔 내가 너무 부족하다. 지금은 공부를 해야할 시간"이라며 "언제가 됐든 코치로서 야구 현장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 기왕이면 롯데팬들께 보답하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어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하는 데는 물론 (이)대호 형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가족들의 힘이 참 컸다. 덕분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참고 버텼다"고 강조했다.
"야구 선수 가족이란게 참 힘들다. 긴 시간 잘 맞춰줘서 고맙고, 이제 야구선수 끝났으니까 내가 가족들에게 보답할 차례다. 이제 첫째가 초등학교 가는데, 내 못 다 이룬 꿈을 시켜볼까 싶다. 아이가 야구를 한다면, 류현진 같은 에이스보다는 이대호 같은 거포로 키우려고 한다."
김영록 기자 lunarfly@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