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돋보기] 미국은 왜 AI를 '국가 총력전'으로 키우나

by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던진 승부수, 'AI판 맨해튼 프로젝트'의 파장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서명한 행정명령 '제네시스 미션(Genesis Mission)'이 그 진원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행정명령을 통해 인공지능(AI)을 단순한 신기술 육성 차원을 넘어, 2차 대전 당시 핵무기 개발에 버금가는 국가 안보와 과학 전략의 '심장'으로 격상시켰다.
이는 미국의 AI 전략이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안전과 신뢰'에 방점을 찍었다면, 트럼프의 제네시스 미션은 '연방 과학 데이터·국가 인프라·민간 빅테크'를 한데 묶어 속도전과 패권 장악으로 태세를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발표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워싱턴 정가와 실리콘밸리가 이 프로젝트를 예의주시하는 이유다.

◇ 미션의 실체…잠자는 연방 데이터를 깨워라
백악관 행정명령과 에너지부(DOE) 발표의 핵심은 명료하다. 연방 정부 창고에 묵혀있던 방대한 과학 데이터를 하나의 통합형 AI 플랫폼으로 묶어, '과학 특화 AI 파운데이션 모델'과 'AI 실험 에이전트'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행정명령은 DOE를 컨트롤타워로 지정했다. 산하 국립연구소의 슈퍼컴퓨터와 실험 시설, 그리고 고유 데이터셋을 '보안이 유지된 통합 플랫폼'으로 연결하라는 지시다.

목표는 기후, 재료, 에너지, 생명과학, 우주 등 각 분야의 데이터를 학습시켜 가설 생성부터 실험 설계, 시뮬레이션까지 연구의 전 과정을 자동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데이터의 질이다.
NIH(국립보건원), NASA(항공우주국), NOAA(해양대기청) 등이 수십 년간 축적한 이 데이터는 인터넷에서 긁어모은 웹 데이터와 차원이 다르다. 측정과 검증을 거친, 말 그대로 "돈 주고도 못 사는" 고순도 자산이다.
백악관은 이 플랫폼이 신약 개발이나 핵융합 같은 난제 해결의 '치트키'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왜 '맨해튼 프로젝트'인가…칩보다 전기가 급하다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이 굳이 "맨해튼 프로젝트급" 혹은 "아폴로 계획급"이라는 수사를 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AI를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막대한 전력과 자원이 투입되는 '제조업'이자 '에너지 산업'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제네시스 미션은 슈퍼컴퓨터와 데이터센터를 묶어 10년 내 미국의 과학 연구 생산성을 두 배로 높이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전력 전쟁'이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이미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 폭증과 전력망 확충 이슈가 한 묶음으로 논의되고 있다.
행정명령에 환경 규제 완화나 원전 건설 패스트트랙 조항이 직접 명시되진 않았지만, 방향성은 뚜렷하다.
보수 싱크탱크와 에너지 업계는 "규제를 풀고 원전과 화석연료 발전을 늘려야 AI 패권을 지킬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결국 칩 공급난보다 전력 부족이 AI 경쟁의 진짜 병목이라는 현실론이 정책 깊숙이 반영된 셈이다.

◇ 빅테크의 지위 변화…규제 대상에서 '전략 파트너'로
미국 정부와 실리콘밸리의 관계도 재정립됐다.
바이든 시절 빅테크가 안전 기준 준수와 평가 의무 등 '관리와 감독의 대상'이었다면, 트럼프 2기의 제네시스 미션은 이들을 "국가 전략 파트너"로 격상시켰다.
백악관 팩트시트는 DOE가 국립연구소, 대학, 그리고 선도적 미국 기업과 "하나의 협력 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주문한다.
정부가 데이터와 인프라(판)를 깔아줄 테니, 빅테크가 그 위에서 기술을 맘껏 펼치라는 '민관 합작 모델'이다.

물론 일론 머스크나 피터 틸 같은 큰손들의 입김도 작용했다.
"과도한 안전 규제가 중국 좋은 일만 시킨다"는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모양새다.
그렇다고 2023년의 안전 가이드라인이 완전히 폐기된 건 아니다. 기존의 안전 프레임워크 위에 '과학 가속'이라는 엔진을 하나 더 얹은 구조다.
실제 집행 과정에서 '안전'과 '속도' 중 어느 쪽이 우선순위를 점할지가 향후 관전 포인트다.

◇ 미중 패권 경쟁…결국은 안보와 AGI
행정명령 곳곳에는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묻어난다.
미국이 AI 기술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이는 곧 경제와 국가 안보의 직결 과제임을 분명히 했다. 중국의 데이터 통제와 군사 AI 굴기에 맞서겠다는 의도다.

제네시스 미션의 표면적 목표는 '과학 AI'지만, 전문가들은 그 이면을 본다.
과학·에너지·우주·양자 연구를 엮는 이 거대 플랫폼이 결국은 장기적인 군사·정보 우위를 위한 토대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각에선 이를 범용인공지능(AGI) 선점을 위한 포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AI를 단순한 산업 기술이 아닌 전략 무기로 취급하는 대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 한국형 '소버린 AI'가 시급…'데이터 커튼' 쳐지나
미국이 연방 과학 데이터를 전략 자산화하고 자국 중심으로 빗장을 걸어 잠글 경우 동맹국인 한국엔 기회이자 곧 위기다.
가장 우려되는 건 '데이터 커튼(Data Curtain)'이다. 미국 주도의 플랫폼에 접근하는 조건이 까다로워질 수 있다. 우리가 미국발 모델과 데이터에 의존할수록 기술 종속을 넘어 '데이터 주권'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이는 역설적으로 한국형 '소버린 AI'의 시급성을 일깨운다.

우리 정부와 네이버, 카카오, LG, SK 등 민간 기업이 추진 중인 독자 생태계 구축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생존 전략이 됐다는 뜻이다.
제네시스 미션은 우리에게 명확한 과제를 던진다.
▲흩어진 공공 데이터의 과감한 통합과 개방 ▲AI 인프라와 전력 수급 계획의 일원화 ▲미·중 사이에서 실리를 챙기는 '이중 전략(소버린 AI+글로벌 협력)' 구사다.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는 3년 만에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제네시스 미션이 3년 뒤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단하긴 이르다. 다만 분명한 건, 미국이 '국가 총력전' 모드에 돌입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한국도 'AI 3강'으로 도약할지, 데이터 커튼 밖의 구경꾼으로 전락할지 판가름 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president21@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