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1977년 의료계 반발 뚫고 의료보험 도입 강행
노태우 전국민 의보 확대, 김대중 의보통합·보장성 강화
미국은 보험사 승인 받아야 의사 진료, 골든타임 놓쳐
기본의료 vs 의사웰빙 충돌, 미국보다 더한 의료지옥 우려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한국에서 병원 가는 일은 회사 출근하는 것보다 빠르다. 의사가 "CT 찍자" 하면 바로 찍을 수 있고, "빨리 수술하자" 하면 곧바로 입원 수속이 가능하다. 검사비가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미국처럼 살림을 거덜 낼 정도는 아니다.
이런 저비용, 고효율 체계는 1977년 박정희 정부가 도입한 강제 의료보험에서 시작됐다. 당시 의료계는 '국가가 가격을 통제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박정희의 과거 남로당 이력까지 들먹이며 반발했지만, 정부는 5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가입을 강제했다. 정부는 대신, 낮게 책정한 진료비(저수가)로 인한 병원의 손실을 보전해주기 위해 병원이 스스로 가격을 정해 수익을 낼 수 있는 '비급여' 항목을 허용했다.
이렇게 정권이 어르고 달래며 만들어진 한국의 의료 체계는 국민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는 '기본 의료'의 원칙 아래 진화를 거듭했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자영업자까지 포함해 가입 대상을 전 국민으로 넓혔고, 2000년 김대중 정부는 수백개의 의료보험 조합을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통합해 환자 간 불평등을 없앴다. 그 덕분에 한국은 환자가 돈 걱정 덜 하고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있는 나라가 됐다.
한국 의사들이 '이상형'으로 꼽는 미국은 정반대다. 보험사가 환자 위에 군림한다. 의사가 "MRI 찍자"고 해도 보험사가 사전승인제를 내세워 "기다려라" 하면 모든 게 멈추는 곳이다. 보험사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동안 환자의 병은 깊어지고 골든타임을 놓쳐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영어 원어민 교사 출신 유튜버 올리버쌤(37·본명 올리버 그랜트)이 미국 의료의 민낯을 고발해 화제다. 그는 한화로 매달 400만원에 가까운 보험료를 내고도 부친이 췌장암 말기에 이르러서야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딱한 사연을 접하다 보면 문득 한 줄기 생각이 스친다. 박정희의 '기본 의료' 도입부터 노태우의 전국민 의료보험, 김대중의 의보 통합이란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의 병원 풍경도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렇다고 올리버쌤이 한국을 마냥 부러워할지 의문이다. 요즘 의사들이 웰빙을 좇아 필수의료를 기피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돈 밝히는 의사'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국민 모두 굶지 않고 먹고살 만하니 공직부터 기업, 편의점 아르바이트까지 사회 전반이 성가신 길을 피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맹장염으로 목숨을 잃던 1977년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의사 수를 늘린다고 의대 신입생부터 전 세계 유례 없는 동맹 파업에 들어가고, 국민은 또 그들을 돈의 노예 보듯 하며 직업윤리를 호소하는 제로섬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낙후된 의료 환경 때문에 "8년간의 미국 생활을 포기한다"는 올리버쌤의 발언이 "한국 의료에 무임승차하겠다는 거냐"는 오해를 사고 있는데, 지난 8년 사이에 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인지 궁금하다.
jahn@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