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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르는 1918년 1월 15일 지중해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우체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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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발발한 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 군부의 부패에 분노하고 이집트 마지막 국왕 파루크 1세의 무능과 사치에 불만을 품었다. 이듬해 청년 장교들로 구성된 비밀 조직인 '자유장교단'을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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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나세르의 주도로 자유장교단은 1952년 파루크 왕정을 무너뜨리는 쿠데타에 성공했고 1953년 공화정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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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르는 대통령 취임 후 빈부격차가 심했던 봉건 체제를 개혁하며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의 업적으로는 아스완 하이댐 건설, 산업화, 토지개혁, 반부패 캠페인, 수에즈운하 국유화 등이 꼽힌다.
그는 1956년 7월 26일 옛소련과 중립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영국과 프랑스가 지분을 갖고 있던 수에즈운하 운영 회사의 국유화를 전격 선언했다.
나세르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한 연설에서 국유화 방침을 발표했다. "우리가 굶주림으로 죽어갈 때 국가 안의 국가로 군림하는 제국주의 기업들이 우리로부터 훔쳐 간 모든 것을 되찾으려 한다"며 서구의 수탈에 대항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국유화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제2차 중동전(수에즈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집트의 저항과 미국의 개입으로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 3개국 군대는 철수했고 결국 수에즈운하도 이집트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 전쟁으로 중동에서 영국과 프랑스 세력은 퇴조하고 미국이 부상했다.
또 수에즈운하 국유화에 성공하면서 나세르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을 뿐 아니라 아랍 지역에서는 열강에 저항한 지도자로 추앙받았다.
범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운 나세르의 리더십 아래 1958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 두 나라가 '통일아랍공화국'을 수립했다. 이 공화국은 시리아가 3년 뒤인 1961년 탈퇴하면서 사실상 해체됐지만, 두 국가의 전략적 협력 관계는 갈등 속에서도 계속 유지됐다.
1967년 아랍연맹(AL)과 이스라엘 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참패한 뒤 그가 추진했던 국내외 정책들은 힘을 잃었다.
나세르는 아랍 지도자들을 모은 정상회의를 주최한 직후 1970년 9월 28일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나세르는 여러 업적과는 별개로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군부 독재자로서 권위주의적 통치와 인권 탄압을 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등 당시 군부 세력은 쿠데타로 공화국을 세우고 근대화를 추진한 나세르의 이집트 혁명 등을 롤모델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출간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세계사에서 성공한 혁명으로 일본 메이지유신 등과 함께 '나세르의 이집트 혁명'을 꼽았다.
나세르의 장례식은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과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등 아랍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당시 수백만 명의 이집트 시민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의 사망을 애도했다고 이집트 언론은 전했다.
반제국주의·범아랍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나세르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게 흘렀지만, 이집트 국민 사이에는 그에 대한 향수가 아직 남아 있다.
sungjinpark@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