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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남정석 기자] '선택, 그리고 집중.'
삼성생명은 지난 시즌 창단 후 처음으로 꼴찌를 맛봤다. 올해로 43년째를 맞으며 그동안 한국 여자농구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의 산실이었던 삼성생명으로선 충격 그 자체였다.
그렇다고 선수 보강은 없었다. 오히려 FA(자유계약)로 양인영을 하나원큐로 떠나보내고 대체 선수인 김단비를 받아야 했다. 여전히 팀의 주축은 베테랑인 김한별 배혜윤 김보미였고, 중고참인 슈터 박하나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올 시즌 거의 뛰지 못했다. 냉정하게 말해 30경기를 치르는 긴긴 정규리그에서 드라마틱한 반전을 쓰기는 어려운 전력이었다. 중위권에 머물며 PO 진출권을 따내는 것이 최선 과제였다.
▶감춰진 칼, 드디어 꺼내다
삼성생명은 PO가 확정된 5라운드 중반부터 주전들을 번갈아 기용하고 식스맨을 중용하며 포스트시즌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5연패에 빠지기도 했다. 많은 선수들이 코트를 들락날락하다보니 아무래도 손발이 맞지 않았다. '이런 경기력으로 PO에 올라가봤자 뭐하나'는 냉소마저 쏟아졌다.
속이 타들어 가는 와중에서도 임근배 감독은 웃음으로 버텨냈다. 단기전을 견딜, 그리고 이겨낼 힘을 기르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여겼다. 접전 상황에서도 기용되는 식스맨들을 보며, 그리고 부상이 아주 심하지 않았음에도 김한별과 배혜윤을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만 기용할 뿐 승부처에서 활용하지 않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의문부호를 던졌다. 임 감독은 승리 대신 다양한 라인업과 작전을 시험해보며 최적의 조합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 모든 것이 '감춰진 칼'이었던 셈이다.
'만수'(만가지의 수)로 불리는 유재학 감독을 남자 프로농구 전자랜드, 현대모비스 등에서 15년간 코치로 보좌한 임 감독의 '천수'는 우리은행과의 PO에서부터 발휘됐다. 높이가 낮은 우리은행을 상대로 더블 포스트 김한별 배혜윤을 번갈아 기용하는 대신 스몰 라인업으로 무장, 상대를 흔들며 정규리그 1위팀을 물리쳤다.
이어 박지수가 버티는 KB스타즈를 상대로는 더블 포스트를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한편 체력 소모가 크고 상대에게 오픈 찬스를 많이 내줄 수 있는 박지수 더블팀 수비를 지양하면서 트랩 수비를 적절히 활용했다. 공격에서는 김한별 배혜윤 등이 박지수가 수비를 하러 나온 사이를 노려 골밑을 효과적으로 공격했고, 윤예빈이 올라운드로 그리고 김보미와 신이슬 이명관이 외곽을 책임지는 등 기막힌 조화를 이뤘다. 상대 골 에어리어에서 최대 5~6번까지 전광석화처럼 패스를 이어간 끝에 메이드 시킨 득점은 숱한 훈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200% 따라준 선수들
아무리 좋은 작전이라도 선수들이 따라주지 못하면 무위로 끝난다. 임 감독이 매 경기 승리 후 "잘 따라준 선수들에게 고맙다는 말 밖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이를 200% 소화해준 것은 바로 코트 위 선수들이다.
부상으로 정규리그에서 자주 빠졌던 김한별은 이를 만회하려는 듯 '봄 농구'에 특화된 자신의 강점을 그대로 발휘했다. 박지수 밀착 수비는 물론 1차전 30득점에 2차전 0.8초를 남기고 꽂은 위닝샷까지 더할 나위가 없었다. 배혜윤은 챔프 1~2차전 연속 18득점으로 뒤를 받쳤고, 윤예빈은 PO에서의 활약을 챔프전에서도 이어가며 차세대 한국 여자 농구를 이끌 대형 가드임을 입증했다. 은퇴를 앞둔 최고참 김보미는 외곽을 점령하는 것은 물론 초인적인 몸놀림으로 알토란 같은 리바운드를 숱하게 잡아냈고, 식스맨 신이슬은 고비 때마다 3점포 작렬로 '승리의 아이콘'이 됐다. 대체 선수로 들어온 김단비는 정규리그뿐 아니라 포스트시즌서도 김한별 배혜윤이 빠진 자리를 훌륭하게 메워내며 팀 이적이 '신의 한 수'가 됐다.
베테랑이 앞장서고 신예들이 뒤따르며 해피엔딩을 완성한 '업셋 드라마'는 여자농구에 길이 남을 전설이 됐다. 신구 리빌딩의 좋은 예를 보여준 삼성생명은 내년 시즌 우리은행과 KB스타즈의 양강 구도를 뒤흔들 최고의 다크호스로 떠올랐음은 물론이다.남정석 기자 bluesky@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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