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게임산업에 또 한 번의 이정표가 쓰여졌다.
펄어비스가 지난 3월 20일(한국시간 기준) 선보인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 게임 '붉은사막'이 출시 26일만인 지난달 15일 글로벌 누적 판매량 500만장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한국에서 개발한 콘솔 게임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임은 물론, 지난해 글로벌 게임 시상식 '더 게임 어워드(TGA)'에서 최고 게임상인 'GOTY'를 수상한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가 5개월만에 올린 500만장 기록과 비교하면 엄청난 성과임은 분명하다.
북미·유럽·일본 중심의 콘솔 패키지 시장은 초기 화제성만으로 장기 흥행을 이어가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붉은사막'의 기록은 무게감이 남다르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부분은 한국 게임산업의 변화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15년 가까이 모바일게임 중심 구조에 머물렀던 국내 시장에서 네오위즈의 'P의 거짓', 시프트업의 '스텔라 블레이드'에 이어 '붉은사막'까지 연이어 글로벌 AAA 콘솔 시장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제 한국 게임사들도 온라인 MMORPG와 모바일을 넘어 콘솔 패키지 시장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입증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년간의 변화 흐름, 대박을 탄생시키다
물론 '붉은사막'의 글로벌 성공은 혼자만의 성과는 아니다. 변화의 조짐은 이미 수 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2023년 등장한 'P의 거짓'은 소울라이크 장르 특유의 높은 완성도를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며 한국 콘솔 게임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해외 이용자들 사이에서도 전투 시스템과 세계관 완성도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고, 국내 게임사들도 콘솔 싱글 플레이 게임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이어 2024년 등장한 '스텔라 블레이드'는 액션성과 비주얼 경쟁력을 앞세워 확실한 존재감을 알렸다. 특히 콘솔 이용자 성향에 맞춘 게임 설계와 글로벌 감각의 연출은 서구권 유저들에게 강한 인상을 줬다. 두 작품 모두 공식 수치는 아니지만 콘솔과 PC 플랫폼에서 500만장 이상이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지난해 넥슨 자회사인 엠바크 스튜디오가 출시해 지난 1월 이미 1260만장을 판매했다고 발표했으며 TGA를 비롯해 글로벌 게임 시상식에서 5관왕을 달성한 익스트랙션 어드벤처 게임 '아크 레이더스' 역시 이 변화에 일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해외 개발 스튜디오 작품이지만, 넥슨이 일찌감치 글로벌 개발력을 겨냥해 투자한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한국 게임산업의 저력과 확장 가능성을 입증한 사례로 평가된다.
그동안 한국 게임들이 모바일 혹은 온라인 MMORPG와 확률형 아이템 중심 수익모델 편중이 크다는 한계가 있었는데, 4년 연속 AAA급 패키지 게임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향후 개발 흐름 다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모바일 강국' 넘어 AAA 경쟁국으로
'붉은사막'의 성공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시장 구조 변화 가능성까지 보여줬기 때문이다.
모바일게임은 빠른 업데이트와 확률형 아이템 중심의 라이브 서비스 구조가 핵심이며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아 경쟁이 심하고 수명이 짧은 반면, 콘솔 패키지 시장의 경우 원작 판매 이후에도 DLC(다운로드 콘텐츠), 확장팩, 플랫폼 계약, 장기 할인 판매 등을 통해 지속적인 수익 창출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AAA 콘솔 게임은 브랜드 IP 가치가 장기간 유지된다는 점에서 산업적 영향력이 크다. 히트 IP의 탄생은 후속작은 물론 영상화와 굿즈, 글로벌 팬덤 형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미 경쟁 게임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붉은사막'은 자체 개발한 '블랙스페이스 엔진'을 활용해 광활한 오픈월드 구성, 실시간 액션 전투, 그래픽 품질, 물리 효과 등을 잘 구현해 글로벌 경쟁작들과 정면 승부를 걸었다는 면에서 한국 개발사들의 기술 경쟁력을 한단계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체 엔진 덕에 출시 초반 다양한 문제점과 불만, 요구사항을 빠른 시간 안에 개선하고 콘텐츠를 보강하면서 글로벌 유저들의 평가를 극적으로 반전시킨 것도 500만장 돌파의 원동력이 됐다.
'붉은사막'의 성공적인 안착으로 이후 국내 게임사들의 콘솔 전략 확대 움직임도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엔씨와 크래프톤, 넷마블, 컴투스 등 국내 대형 게임사뿐 아니라 중견 개발사들도 콘솔과 PC 기반 글로벌 프로젝트 비중을 꾸준히 늘리고 있으며, 언리얼 엔진 기반 액션 게임 개발과 스팀 및 콘솔 플랫폼 중심 프로젝트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예전에는 국내에서 마이너 장르로 여겨졌던 콘솔 개발이 이제는 업계 전체의 중장기 전략으로 자리잡아가는 분위기다.
이재홍 한국게임정책학회 회장은 "'붉은사막'은 단순한 흥행작을 넘어 한국 게임 산업이 글로벌 AAA 콘솔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어 "자체 엔진 기술력과 글로벌 이용자 대응 역량, 한국적 정서를 글로벌 이용자 문법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크로스컬처 텔링(Cross Culture Telling)까지 입증하며 국내 게임사들의 개발 방향성을 제시했다. 이제 K-게임의 세계화 흐름이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남정석 기자 bluesky@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