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이현석 기자]"처음부터 뛰지 않아도 된다. 걸어도 되니까 한번 시작해 보면 좋겠다." 장애인 생활 체육의 문턱을 넘어, 세계 마라톤의 꿈을 키우는 두 사람. 이민규(42)-홍은녀(47) 부부는 첫걸음이 가진 힘을 믿는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발걸음, 수천 명의 사람들. 그 사이로 서로를 의지하며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50cm의 끈으로 연결된 '트러스트 링'과 함께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러너가 코스에서 구슬땀을 흘린다. 긴장감과 웃음 속에서 보폭을 맞추며 완주를 향해 멈추지 않는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 달리기로 트랙 위에서 다 같은 '러너'가 되는 순간이다.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으로 사물의 형체 정도를 볼 수 있는 이민규씨와 선천성 망막색소변성증으로 빛 정도만 감지할 수 있는 홍은녀씨는 어엿한 11년 차 러너다. 시각장애인인 두 사람의 출발점은 지인의 권유였다. 2024년 파리패럴림픽에 대한민국 최초로 출전한 장애인 철인 3종 국가대표 김황태의 추천으로 2016년 에쓰오일에서 주최한 '감동의 마라톤'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마라톤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리스 아테네 대회를 시작으로 두 사람의 삶에 러닝이 녹아들었다.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부부였기에 놀라운 선택이다.
남편 이씨는 "우린 둘이서 운동을 한 적이 없다. 숨쉬기 운동만 했다. 주말 되면 누워서 뒹굴거리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일상에 활력을 얻을 활동을 하지 않았다"며 "추천을 받아서 연락이 왔다. 운동을 안 해봤기에, 우여곡절 끝에 나갔다. 아테네 마라톤에서 10㎞ 뛰었다. 경종을 울리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회상했다.
오랜 시간 함께 여러 대회를 누볐지만, 부부가 대회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사뭇 다르다. 완주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자신만의 '런'을 즐긴다. 남편은 '펀 런(즐거운 러닝)'과 함께 미소를 잃지 않는다. 아내는 자신과의 싸움, 성장을 목표로 기록에 집중해 달린다. 아내는 "내가 마라톤에 점점 더 빠져든 건 나와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마라톤은 정직하다. 노력하면 성장한다. 달성하면 인정받는다. 나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 큰 영향을 줬고, 즐거웠다"고 했다. 남편은 "실력을 올리는 것도 즐겁지만,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는 것에 즐거움이 있다. 가이드에게 코스 주변 환경을 말해주길 부탁하기도 한다. 눈으로 담지는 못하지만, 머릿속으로 그런 추억을 쌓는다"고 했다. 42.195㎞를 함께 달리며 서로를 향한 애틋함도 커졌다. 홍씨는 "새벽 훈련도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취미도 함께 하니까, 모든 순간에 같이 있어서 좋다"며 웃었다.
러닝의 매력에 빠져들었지만, 어려움도 있었다. 가이드러너 문제다.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코스에서 뛰면서, 마라톤의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조력자가 가이드러너다. 가이드러너는 단순히 함께 뛰는 역할이 아니다. 시작부터 완주 지점까지 시각장애인의 눈이자 페이스 메이커가 된다. 러너와의 호흡, 코스 상황을 고려한 정확한 지시 등이 중요하다. 함께 뛰는 과정에서 신뢰가 쌓이지 못하면 완주도, 기록 단축도 이뤄질 수 없다. 최근 러닝 열풍과 함께 수가 늘었지만, 과거에는 가이드러너가 배정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홍씨는 "지금은 한 사람과 오래 연습해서 대회를 나갈 수 있지만, 시작할 당시에는 가이드러너도 많지 않았다. 대회 당일에 만나서 호흡을 맞추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전맹이기에, 파트너와 신뢰가 있어야 뛸 수 있다. 불안하니까 몸도 긴장돼서 기록을 낼 수 없었다. 그런 부분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어려움을 딛고 지켜낸 마라톤 열정, 부부의 꿈은 이제 세계를 향한다. 지난해 8월 시드니 마라톤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국제 마라톤 도전에 나섰다. 목표는 '세계 7대 마라톤' 참가다. 세계적인 러닝 열풍과 함께 참가 신청조차 쉽지 않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시드니를 시작으로 올해 3월에는 도쿄, 4월에는 보스턴 마라톤에 신청, 완주하며 벌써 목표를 절반 가까이 채웠다. 10월에는 시카고 마라톤에 참가한다. 뉴욕, 런던, 베를린이 남았다. 홍씨는 "최초로 7대 마라톤을 완주한 부부가 돼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목표를 세웠으니까, 꼭 다 완주해 보고 싶다. 기록 욕심도 있다. 여자는 패럴림픽 참가 기준 기록이 3시간30분이다. 내 최고 기록이 3시간30분33초다. 패럴림픽 기준 기록도 꼭 달성하고 싶다"고 의지를 다졌다.
국제 마라톤 대회들은 이미 시각장애 러너들에게 더 열린 무대다. 체계적 지원과 규정을 통해 장애인 러너들의 문턱을 낮췄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보스턴 마라톤은 장애인 참가자를 위한 별도 부스와 셔틀 서비스 등을 마련한다. 이씨는 "보스턴 마라톤과 같은 대회는 출발 때부터 규정에 적혀 있다. 휠체어 참가자, 엘리트 참가자, 그리고 시각장애인들이 출발한다. 이후 다른 참가자들이 뛴다. 문화 자체도 다르다. 완주 메달을 걸고 돌아다니면 거리에서 만나는 모두가 축하해준다"고 했다.
글로벌 러너 부부는 장애인 스포츠의 첫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라톤 시작 전 90kg이 넘었다는 이씨는 첫걸음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처음 시작했을 때 몸무게가 90kg 후반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살이 빠지면서 건강해지고 자존감도 높아졌다"며 "100m라도 뛰어보자는 생각으로 접근했으면 한다. 100m가 10㎞가 되고, 하프가 된다. 한 발을 내디뎌야 뭐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부창부수', 홍씨가 화답했다. "줄을 잡고 신뢰할 수 있으면, 언제든 달릴 수 있다. 꼭 빠를 필요는 없다. 자신의 속도로 천천히 즐겼으면 좋겠다."
이현석 기자 digh1229@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