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이닝, 투수의 기록을 공식화하기 위해 소화해야 하는 투구 회수를 말한다. 팀이 소화한 경기수와 같다. 144경기 체제인 올 시즌 규정이닝은 144이닝이다.
시즌 도중에는 당연히 그 팀이 치른 경기수대로 규정이닝이 책정된다. 평균자책점처럼 '평균치'를 계산해야 하는 순위를 보면,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들의 이름만 올라있다. 선발투수들의 경쟁, 그런데 그 속에 낯선 이름이 있다. 한화 이글스 불펜투수 권 혁이 그 주인공이다.
권 혁은 14일까지 36이닝을 소화했다. 팀이 치른 36경기와 동일하다. 매일 규정이닝의 경계선에 있는 권 혁은 평균자책점 순위를 들락날락 거린다. 14일 기준으로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는 총 27명, 그런데 이중에서 선발 외에 등판한 선수는 권 혁뿐이다. 권 혁은 23경기 모두 중간계투로 나섰다.
이쯤 되면, 1999년 삼성 라이온즈 임창용이 떠오른다. 당시 그는 선발등판 한 차례 없이 71경기서 138⅔이닝을 던졌다. 웬만한 선발투수만큼 던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순수 불펜투수의 규정이닝 달성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나올 수 없는 구원투수가 규정이닝을 채우려면 등판했을 때마다 길게 던져야만 한다. 임창용처럼 마무리가 아닌 중간쯤 나와 경기 끝까지 책임지는 '중무리'로 나와야만 가능한 것이다.
권 혁은 시즌 초반 과거와 마찬가지로 짧게 던지는 듯 했다. 하지만 4월 2일 두산전 2이닝 무실점 이후 2이닝 가량 책임지는 날이 많아졌다. 4월 17일 NC전과 4월 22일 LG전에서는 3이닝을 소화하기도 했다.
3연투가 세 차례, 2연투가 세 차례다. 많은 이들이 권 혁에 대해 우려를 가질 만도 하다. 그렇다면 권 혁은 이런 페이스로 144이닝을 채울 수 있을까.
김성근 감독이 SK 와이번스를 '불펜왕국'으로 이끌었을 때 기록을 살펴보자. 부임 첫 해였던 2007년, 순수 불펜투수 중 가장 많은 이닝을 던진 이는 정대현(78⅓이닝)이었다. 그 뒤를 윤길현(75이닝)과 조웅천(74⅔이닝)이 이었다. 2008년에는 정우람이 77⅔이닝을 책임졌고, 선발등판 4회를 포함한 김원형이 74⅓이닝으로 뒤를 이었다.
주축 불펜투수들이 70이닝대를 소화했던 2007년 2008년과 달리, 2009년에는 이닝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49경기에 등판한 전병두는 11차례 선발등판을 포함해 133⅓이닝을 던져 규정이닝을 채웠다. 이승호는 1경기 선발등판을 포함해 68경기서 106이닝을 던졌다.
전병두는 몰라도, 이승호는 사실상 순수 구원투수였다. 2010년에도 100이닝을 넘게 던진 중간계투가 있었다. 정우람이 75경기 모두 불펜등판해 102이닝을 소화했다.
중도퇴진한 2011년을 제외하고 2009년과 2010년만 보면, 이승호와 정우람이 100이닝을 넘게 소화했다. 현재 23경기에서 36이닝을 던진 권 혁은 경기당 평균 이닝수로 환산했을 때, 2009년 이승호의 페이스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권 혁이 규정이닝을 채울 것이라 보는 이는 많지 않다. 시즌 끝까지 그렇게 많이 던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2010년 정우람 이후 5년만에 100이닝 소화 투수가 나올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