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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선수]'척수장애 뛰어넘은 체조인'김소영의 나눔 위한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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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는 '인생극장'이었다. 1m37의 키 30㎏의 체중으로 거침없이 날아오르던 재능충만한 체조 소녀, 이단평행봉 위로 아찔하게 날아오르던 소녀가 인생의 가장 큰 무대 앞에서 날개를 잠시 접었다. 척수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1986년 8월 28일, 서울아시안게임 직전의 일이었다. 당시 메달 유망주로 손꼽혔던 소녀의 나이는 꽃다운 16세,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3년 넘는 병원 생활을 마치고 그녀는 휠체어를 탄 채 책을 펼쳤다. "내년이면 벌써 '30주년'이 돼요. 30주년을 맞아 뭘 한번 해볼까 생각중이에요"라며 생긋 웃는다. 개구쟁이같은 눈웃음 뒤엔 '뭔가 재밌는 일 없을까' 골똘한 궁리가 가득하다. 10월 어느 가을날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김소영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재활지원센터장을 만났다.

▶일단 영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공중제비를 척척 돌아내던 '체조요정'이 어느날 갑자기 손목만 겨우 움직이는 척수장애인이 됐다. 그 나락같은 절망감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의 바닥에서 만난 멘토들이 그녀를 공부의 길, 도전의 길로 이끌었다. '공부하는 선수' 인터뷰 요청에 손사래 치던 그녀가, "공부를 두려워하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한마디에 마음을 바꾼 이유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재활하는 동안 사회사업실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그녀의 공부방이자 놀이방이었다. 자원봉사자로 온 교포 출신 연세대 교목의 딸과 절친이 됐다. 영어공부를 놀이 삼았다. 병실에 꼼짝없이 누워있던 그녀는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출신 '멋쟁이' 선배 고 이성근씨를 만나며 마음을 열었다. 먼저 장애인이 된 그는 '수호천사'를 자청했다. "소영아, 앞으로 휠체어 타고 잘 살려면 뻔뻔해져야 해." 명랑하지만 숫기는 없었던 소녀가 씩씩해졌다. 휠체어 바퀴에 의지해 그녀는 세상의 벽에 거침없이 도전했다.

퇴원후 처음 시작한 건 공부, 그 중에서도 영어였다. 김 센터장은 태릉선수촌에서 놀면서 오간 영어교실이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됐다고 했다. "선수촌에 있을 때 영어 노래를 많이 배웠거든요. 그때 배운 크리스마스 캐럴, 팝송은 지금도 가사가 다 생각나요." 고향 청주를 떠나 서울 반포에 자리잡은 그녀는 집앞 학원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로 생각하기'를 모토 삼은 학원의 모든 책은 원어였다. 매월 40만원의 장애연금 중 거금 12만원을 학원비로 투자했다. 일주일 내내 학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렇게 1년쯤 영어로 생활하다보니 느낌이 왔다. 교회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생활속에서 영어습관을 이어갔다.

▶미국 유학 '나눠주기 위한 공부'를 했다

"공부는 목표가 있어야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일찌감치 '유학'을 목표 삼았다. 용산 미 8군 안에 메릴랜드대 분교가 있다고 했다. '토플 550점이면 갈 수 있고, 유학 후 학점을 인정받는다'는 말에 그날로 토플 준비에 들어갔다." 1993년 토플 550점을 딴 후 메릴랜드대에 입학했다. '유학을 가려면 원서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엔 용감하게 영어 소설을 집어들었다. "시드니 샐던의 추리소설을 많이 읽었다. 원서에 도전한다면 추리소설을 추천한다.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져 일주일이면 뚝딱 읽는다. 6~7권 읽고 나니, 영어로 생각하는 게 뭔지 알겠더라. 문장이 영어로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학의 꿈을 이루는 데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해, 오랜 꿈이 거짓말처럼 이뤄졌다. 외국인교회에서 우연히 만난 미국인 할아버지 '미스터 그로브'가 후원을 자청했다. '키다리아저씨'였다.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스터스 컬리지 입학허가서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또다시 난관에 부딪쳤다. 휠체어용 전용차량이 필요했다. 1년 후 학교측에서 그녀의 등교를 도울, 전용차량이 마련됐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기적처럼 찾아온 기회, 희망으로 떠난 미국에서의 첫 1년, 그녀는 컴퓨터 앞에서 엉엉 울었다고 했다. "영어가 어려운 것은 둘째다. 미국은 거의 다 '페이퍼'다. 자기 생각을 풀어내야 하는데 힘들었다. 한시간에 한단어도 못쓰고, 생각도 안났다. 암흑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자기일처럼 도와주고, 가르쳐주고, 응원해줬다." 그녀가 꺼내보인 필기 노트는 놀라웠다. 불편한 왼손으로 정성스럽게 써내린 글씨엔 '혼'이 담겼다. 필체는 한치 흔들림없이 '단아'했다. "그나마 휘갈겨 쓸 때는 오른손으로, 정성스럽게 써야할 때는 왼손으로 쓴다"고 했다. 남들보다 느리게 오래 써내려갔지만, 머릿속에 새겨지는 속도는 빨랐다.

5년만인 2007년 마침내 상담학 학사모를 썼다. "처음엔 상담을 전공하고 싶지 않았다. 남의 고민을 떠안는 것은 불행할 것이라 생각했다. 유학 후 나를 진심으로 돕는 친구들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이의 아픔을 끌어안는 것, 남의 인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나는 학력을 위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다. 나누기 위한 공부를 했다. 내가 현재 일하는 분야는 최전방이다. 척수 장애인들을 가장 가까이서 만나고, 듣고, 보고, 공감할 수 있어 행복하다."

▶'체조인'이기에, 공부도 일도 잘할 수 있다

그녀의 20년, 치열했던 공부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노트북을 덮으려는 찰라, 그녀가 문득 말했다. "그래도 저, 체조한 걸 한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후회할 것이라고 속으로 넘겨짚었었다. 다시 노트북을 펼쳤다. "우리 아버지는 눈을 감으시는 날까지 체조하는 딸을 말리지 못한 걸 후회하셨지만, 나는 단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어요. 물론 더 이상 할 수 없게 돼 속상한 건 있지만"이라며 웃었다.

그녀는 천생 체조인이자 체육인이다. "어릴 땐 남들이 못하는 공중돌기를 하며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었고, 장애인이 된 후에도 체조로 인해 감사한 일이 많았으니까"라고 털어놨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솔직히 힘들고 무섭죠. 그래도 체조만큼 힘들진 않아요. 체조에서 새 난도 배울 때만큼 무섭진 않아요. 나는 체조로 단련됐고, 체조를 통해 기본기를 배웠고, 훈련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원없이 해봤으니까요"라며 웃었다. "우리 운동선수 출신들에겐 무한한 잠재력이 있어요. 죽어라 운동했던 그 의지력, 그 체력이라면 공부든 뭐든 다 잘할 수 있어요."

절망의 터널을 씩씩하게 뚫고나와, 20대 중반의 나이에 장애인 스키 캠프를 기획했고, 스킨스쿠버에 도전했고 30대엔 혈혈단신 미국 유학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그녀는 2013년부터 한국척수장애인들을 위한 재활센터에서 '공부'를 나눠주고 있다. 노란 휠체어에 '초록 돌고래'를 매단 그녀는 오늘도 세상을 향해 날아오른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