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죠. 인생 처럼 말이에요."
그렇다. 필드 위는 늘 '도전'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운명을 개척하듯 변수에 대처해 가는 수 밖에 없다.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는 게 최선. 하지만 말이 쉽다. 사는 일도 실은 이게 제일 어렵다.
한국 여자 골프의 간판이자 자존심 유소연과 박성현. 올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나란히 웃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1라운드 취소가 영향을 미쳤다.
정반대의 이유였다. 유소연은 취소 당시 2언더파로 선두권을 달리고 있었다. 반면, 박성현은 6오버파로 최하위권이었다. 이러던 중 폭우가 이어졌고 결국 1라운드가 캔슬됐다. 주최 측은 대회를 아예 54홀로 줄었다.
유소연에게는 불리한 결정이었고, 반면 박성현에게는 유리한 결정이었다.
심리적 변화는 리셋 후 다시 시작된 1라운드에 바로 영향을 미쳤다. 유소연은 흔들렸다. 다시 시작된 1라운드에서 샷이 흔들리면서 4오버파로 컷 탈락 위기에 처했다. 유소연은 1라운드 스코어카드 제출 후 셔틀을 타고 드라이빙 레인지로 이동하던 중 눈물을 쏟았다. 마음을 추스른 유소연은 2라운드에서 2타를 줄여 컷 탈락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실 저한테는 기쁜 결정이 아니었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막상 1라운드 경기가 잘 안 되니까 그 상황들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박성현은 믿기지 않을만큼 기뻤다. 하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새로운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결과는 대성공. 1라운드에서 이글 1개와 버디 7개, 보기 1개를 묶어 8언더파로 선두에 올랐다. "(경기 취소 소식을 듣고) 솔직히 안 놀랐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무래도 저한테는 잘 된 일이다. 어제 플레이를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반전에 성공했지만 그 상황에 대한 기억이 발목을 잡았다. 하늘이 준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의식이 스스로에 대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2라운드 73타에 이어 최종 라운드에서는 77타로 선두권에서 멀어졌다. 1라운드와 최종라운드 간 타수 차는 무려 14타였다.
추운 날씨와 최근 샷감 등 복합 변수가 두 정상급 선수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지나간 일에 대한 심리적 부담도 무시할 수 없었던 대회였다.
통제 불가의 변수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망각이다. 잊지 못하는 기억이 부담으로 변해 앞으로 나가려는 발목을 잡는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모두 지나간 일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현재, 지금 눈 앞의 샷이다. 인생처럼 골프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이다. '카르페 디엠!'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