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시대 실존 인물의 파란만장한 생애 담은 역사소설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내 입에서 아랍어, 튀르크어, 카스티야어, 베르베르어,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고 이탈리아어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언어, 모든 기도가 내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것에도 속해 있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유럽을 종횡무진하며 살아간 실존 인물의 생애를 담은 아민 말루프(76)의 장편소설 '레오 아프리카누스'(교양인)가 13일 국내에 처음 번역 출간된다.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15세기 후반 이슬람 국가 나스르 왕조의 영토였던 스페인 그라나다 지역에서 태어나 16세기 중반까지 활동했던 외교관이자 탐험가, 학자다.
부유한 검량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알하산 이븐 무함마드 알와잔'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내던 그는 모국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공격받자 다른 이슬람 왕조가 지배하던 지금의 모로코 페스 땅으로 망명한다.
유난히 영민했던 그는 16세 어린 나이에 술탄의 외교 사절로 사하라 사막을 건너 팀북투를 방문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해적에 납치돼 로마에 노예로 팔려 간다.
노예로 전락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돼 당시 교황이던 레오 10세의 눈에 들었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두 세계를 연결하는 학자로 변신한다.
그는 라틴어·아랍어·히브리어 삼중어 사전을 만들고 아프리카의 지리와 생활, 생태를 다룬 기념비적인 책 '아프리카 지리지'를 펴내 레오 아프리카누스라는 호칭을 얻는다.
소설은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자기 삶을 회고하는 형식이다. 쉽게 세계를 일주할 수 있는 현대인의 시선으로도 믿기 어려울 만큼 파란만장한 인물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그렸다.
다만 극적인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작가는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남긴 무수한 발자취나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재능보다도 그의 정체성을 심도 있게 탐구한다.
그라나다에서 모로코, 카이로, 로마를 떠돌고 이름, 종교, 언어, 국적을 바꿔야 했던 주인공의 삶은 곧 문명과 문명이 충돌하고 대결하는 시대 속에서 경계의 어느 쪽에 설지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당하는 개인의 고단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레바논 출신인 작가 아민 말루프는 자국에 내전이 일어나자 1976년 프랑스로 귀화했다는 점에서 주인공과 공통점이 있다. 그는 1986년 자신의 첫 소설인 이 책을 펴낸 직후 인터뷰에서 "나는 나 자신을 묘사하고 싶었다"며 "나는 레오 아프리카누스처럼 여러 문명 사이에 낀 존재"라고 말했다.
말루프는 '사마르칸트'로 프랑스 출판협회상을, 1993년 '타니오스의 바위'로 프랑스 최고 문학상으로 꼽히는 공쿠르상을, 2022년 박경리문학상을 받은 세계적안 작가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이원희 옮김. 5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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