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진단 탓, 오늘은 입원 탓"…과거 약관에 없는 '실질적 입원' 잣대 적용
(서울=연합뉴스) 서한기 기자 = 오랜 기간 성실히 보험료를 납부하며 '만일의 위험'에 대비했던 실손의료보험 가입자들이 '의료비 폭탄'을 맞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당연히 '입원'으로 인정받던 백내장 수술을 두고 보험사들이 일방적으로 말을 바꾸며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어서다.
법원의 판결마저 엇갈리면서 애꿎은 환자들은 기나긴 법정 다툼과 국민청원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지만, 구제의 길은 멀기만 하다. 피해자는 소송에 참여한 수백 명을 넘어 최대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 갈등의 시작점 '2016년 약관 변경·2020년 수가 개편'
25일 의료계와 최근 법원에 제출된 소송자료에 따르면 이런 분쟁의 배경에는 정부와 금융당국의 실손보험 약관 및 의료 수가 정책 변경이 자리 잡고 있다.
2016년 1월 1일 금융감독원은 백내장 보험금 지급액이 늘어나자 실손보험 표준약관을 개정했다. 이 시점 이후 가입자부터는 백내장 수술에 사용되는 '다초점 인공수정체 재료대'가 보상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현재 소송에 나선 원고들은 모두 그 전에 보험에 가입한 이들로, 변경 전 약관에 따라 온전히 보장받는 게 마땅했다.
이후 2020년 9월 보건복지부는 기존에 비급여 항목이었던 '눈의 계측검사'와 '안(眼) 초음파 검사'를 급여 항목으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백내장 수술 관련 비급여 항목은 사실상 '다초점 인공수정체 재료대'만 남게 됐고, 보험사들은 바로 이 비용 지급을 피하기 위해 '입원' 자체를 문제 삼는 전면전을 시작한 것이다.
◇ 교묘한 말 바꾸기…'과잉 진료' 문제 삼다 '입원'으로 타깃 변경
이런 배경 속에서 보험사들의 보험금 지급 거절 논리는 2022년을 기점으로 180도 바뀌었다.
이전까지 보험사들은 "수술이 필요하지 않은데 과잉 진료를 받았다"며 '백내장 진단의 적정성'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2022년 6월 대법원에서 진료기록부상 입원 시간이 짧고 입원 중 특별한 처치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단시간의 입원은 실질적 입원으로 보기 어렵다'는 취지의 판결이 나오자 일제히 전략을 수정했다.
당시 대법원은 환자의 상고를 본안 심리조차 하지 않은 채, 즉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판결해 논란을 낳았다.
이런 대법원판결 이후 보험사들은 이제는 백내장 진단은 인정하면서도 "수술은 했지만, 입원은 아니다"라며 입원 보험금을 통원 한도(20만∼30만원)로 삭감하기 시작했다. 이는 보험사들이 일관된 원칙이 아닌, 오직 보험금 지급을 피하려는 상황 논리에 따라 가입자를 대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 계약서에 없던 '실질적 입원' 잣대, 누가 만들었나
이런 사태의 핵심 쟁점은 '실질적 입원'이라는 모호한 기준이다.
하지만 현재 소송에 나선 환자 대부분이 가입한 1·2세대 실손보험 약관 어디에도 '실질적 입원'을 위해 특정 시간 이상 체류해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당시 약관은 '의사의 진단에 따라 의료기관에 입실해 치료에 전념하는 것'으로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을 뿐이다.
'계속하여 6시간 이상 체류'와 같은 구체적 기준이 등장한 것은 2021년 7월 출시된 4세대 실손보험부터다. 결국 보험사들은 과거의 계약자에게 현재의 잣대를 들이대는, 명백한 '소급 적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더욱이 올해 6월 현재, 환자들이 수술 후 6시간 이상 병원에 머무르며 처치를 받아도 보험사들은 여전히 입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는 약관의 뜻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계약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작성자 불이익 원칙'에도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다.
◇ 국가가 인정한 '입원'…보험사만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보험사들의 주장이 국가의 공식적인 의료 체계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2003년부터 백내장 수술에 포괄수가제(DRG)를 적용하며, 이때 책정된 평균 입원 일수는 '1.03일'이다. 이는 국가가 백내장 수술을 최소 1박 2일에 준하는 '입원 치료'로 공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환자 측은 "6시간 미만 관찰 후 귀가하도록 한 것은, 불필요한 장기 입원을 막고 의료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국가 정책에 협조한 결과일 뿐, 수술의 본질이 통원 치료라는 의미가 아니다"고 항변한다. 실제로 2016년과 2020년, 금융당국과 복지부가 백내장 관련 수가를 개편할 때도 '입원'의 기준 자체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당시 모든 이해관계자가 백내장 수술을 '입원 전제 치료'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엇갈린 사법부…혼란 속 깊어지는 환자들의 절망
상황이 이런데도 사법부의 판단은 엇갈리며 혼란을 부추기는 모양새다.
하급심에서는 "약관에 최소 체류 시간 규정이 없고, 수술 후 합병증 관찰을 위한 입원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환자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심지어 보험사기 혐의로 기소된 환자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며, 입원비 청구의 정당성을 인정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일부 대법원판결이 '짧은 입원은 실질적 입원이 아니다'라는 해석을 내놓자 보험사들이 이를 모든 사례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면서 분쟁은 격화되고 있다.
수십 년간 유지된 사회적 합의와 신뢰를 저버린 보험사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법부 사이에서 성실하게 보험료를 납부해 온 가입자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하고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금융당국의 적극적인 역할과 사법부의 일관된 기준 제시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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