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자멸 '제1차 세계대전' 조명한 역사서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20세기는 유럽에 희망의 세기였다. 그럴 만했다. 1800년 유럽은 전 세계의 38%를 장악했으나 1914년 무렵엔 이 비율이 84%까지 올랐다. 1870년대부터 30년간 생산과 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사회와 생활방식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값싸고 좋은 식품, 위생의 개선, 의학의 극적인 발전 덕에 유럽인들은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았다. 인구는 30년간 1억명이나 늘었지만, 산업과 농업의 생산 증가와 전 세계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수입 덕택에 풍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근심이 없었다…. 무엇이 이런 성장을 가로막고, 무엇이 늘 새로운 힘을 끌어내는 활력을 방해할 것인가? 유럽은 이보다 강하고 부유하며 아름다운 적이 없었고, 더 나은 미래를 이토록 열렬히 믿었던 적도 없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당대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유럽인에게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즉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최전성기 속에서 위험의 씨앗이 싹텄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결정적인 순간 인간은 이성보단 감정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은데, 1914년 무렵에도 그랬다. 거대한 발전 속에 유럽의 열강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국 내 남슬라브 민족주의와 세르비아 독립에 대해 조처하지 않으면 제국이 무너질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프랑스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더 강해지는 독일을 두려워했다. 독일은 빠르게 발전하면서 재무장하고 있는 러시아와 빨리 싸우지 않으면 영원히 뒤처질 거라 두려워했다. 영국은 하나의 강대국(독일)이 유럽을 지배하는 걸 두려워했다.
각국은 이처럼 서로를 두려워했지만, 자국민도 두려워했다.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했고,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이 기존 지배계급의 권위에 도전했다. 빈부 격차도 갈수록 심해져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었다. 표면은 '아름다운 시절'이었지만, 그 밑단은 파괴적인 에너지가 축적되고 있었다. 게다가 비스마르크 같은 상상력이 뛰어난 정치인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상태였다. 위기는 켜켜이 쌓여가는 데, 이를 헤쳐갈 만한 인물들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4년 7월 28일, 마침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신간 '평화를 끝낸 전쟁'(책과함께)은 전성기에 놓였던 유럽이 어떻게 자신을 자멸로 이끌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지를 그린 역사서다.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근대사 전문가인 마거릿 맥밀런 옥스퍼드대 명예교수가 제1차 세계대전 전, 위기로 향하는 유럽의 상황을 촘촘하게 분석했다. 100년도 전에 발생한 일을 담은 이 '벽돌 책'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강대국 간 균열이 싹트고, 타인에 대한 증오와 경멸에 편승한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오늘날의 상황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 유럽의 상황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허승철 옮김. 9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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