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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들] 7세 고시 금지? 반세기 넘게 돌리는 고장난 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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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아 유치원 입시 열풍, 뿌리깊은 학벌주의·서열의식 탓
조기 사교육 1960년대부터 확산, 온갖 규제에도 효과없어
자율전공제 의대 포함, 교수사회 밥그릇 싸움에 난항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요즘 학부모들 사이에 '4세 고시', '7세 고시'라는 말이 유행한다. 스파르타식 조기 교육과 선행학습을 제공하는 유명 유치원 입학시험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쟁을 뚫고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고 해 '고시'라는 말이 붙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고 고난도 수학 문제를 척척 풀 줄 알아야 장차 의대와 명문대에 보낼 수 있다는 부모들의 강박이 이런 기괴한 현상을 만들어냈다. 자식의 대학 간판이 부모의 인생 성적표가 되어버린 선진 한국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에서 4세, 7세 고시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중학교 입시가 존재했던 1960년대, 여유 있는 집안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과외에 내몰렸다. 명문 중학교 합격이 명문대 진학의 필수 코스였던 탓이다. 유명 사립초가 문을 연 것도 1960년대였다. 특히 서울의 3대 사립 초등학교로 불린 경기, 경복, 리라의 입학 경쟁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조기 사교육 열풍에 놀란 박정희 정부는 1969년 중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1974년 고교 평준화 정책까지 도입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사교육은 되물림되고 있다. 인문계 고등학교 입시와 대입 학력고사를 뚫고 4년제 대학에 진학한 이들이 86 세대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말하지만, 86 세대가 사교육 시장을 팽창시키는 데 일조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아이러니다. 86은 지금의 2030을 낳았고, 그들에게서 4세 고시가 파생했다.
이제 입시 구조 자체를 건드리는 것 외에는 달리 처방이 없어 보인다. 지난 정부 때 추진했다가 철회된 미국식 자율전공제 전면 확대도 한 대안이다. 특히 의약계열과 AI(인공지능) 등 인기전공 진학을 대학 입학 후 내부 경쟁으로 전환하는 방안에 목소리가 실리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조기 사교육 열기가 크게 꺾이고 지방대 고사 흐름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율전공제의 부작용도 없지 않을 것이다. 대학 내부가 의대 전공 경쟁으로 황폐해지고 의학교육의 질과 연속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론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결국 비인기 전공 교수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귀결된다. 의대생 동맹 휴학과 전공의 사직 사태를 보면 의학교육 연속성 시비도 반대를 위한 형식 논리라는 걸 알 수 있다. 자율전공제 말고도 영유아 의대입시반을 뿌리뽑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당장의 여론이 두려워 정치권과 정부가 잠시라도 어려운 길을 가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국 학원 단체들이 영유아 고시를 전면 금지하기로 결의한 데 이어 국가인권위가 극단적 선행학습 금지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교육부에 권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 사교육은 법으로 막는다고 없어질 문제가 아니다. 박정희 정부의 고교평준화로 학원 산업이 커지고 전두환 정부의 재학생 대상 대입학원 금지로 불법 과외가 성행했듯이 영유아 고시 금지는 음성적인 단체 과외 열풍 같은 풍선효과를 낳을 게 뻔하다.
정치권과 당국은 고장 난 레코드를 돌릴 시간에 현장에 나가기 바란다. 내 자식만큼은 명문대 갈 것이라며 '희망회로'를 돌리는 학부모와 그들 밑에서 학대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기존 틀에 갇힌 사고가 달라질 것이다. 대학 교수들도 이제 밥그릇을 내려놓을 때가 됐다.
jahn@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