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 최고존엄 등장 여부 촉각…주목받는 '주애 공주'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북한으로 칭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주국이 아닌 현대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3대 혈통 세습에 성공했다. 겉으론 공화국 형태이지만 사실 한 가문이 모든 권력을 갖고 대를 이어 세습하는 왕정과 다름없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대한민국이 건국 때부터 민주 정치를 꾸준히 발전시켜온 것과 달리 북쪽은 소련 군정이 끝나고 권력을 잡은 김일성에 이어 아들과 손자까지 80년 가까이 세습 독재 정치가 이어져 왔다. '조선이 이씨에서 김씨로만 주인을 바꾼 전근대적 봉건 체제'라는 비판도 있다. 국호 역시 조선을 계승했다.
평범한 누구라도 궁금증이 든다. 인공지능(AI)과 가상현실이 일상에 파고든 첨단사회에서도 과연 김씨 왕조가 4대 세습에 성공할 수 있을까? 향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도 관련된 문제이니 섣불리 예측할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현 지도자인 김정은이 후계 세습을 본격화했다는 판단엔 전문가들도 동의한다. 2022년 처음 등장한 딸 주애가 부친 바로 옆에서 의전 수행을 하는 모습이 자주 노출돼 와서다. 올해 구축함 강건호 진수식 때는 최고존엄보다 한 계단 높이 선 극히 이례적인 사진까지 공개됐다. 고모 김여정이 공식 행사에서 조카 주애에게 허리 숙여 자리를 안내하는 장면도 주목받았다. 우리 정보기관도 이미 주애를 현시점 유력 후계자라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중국 전승절 행사는 김주애 후계설에 쐐기를 박는 듯 보였다. 김정은이 다자외교 첫 무대이자 반서방 공조를 위한 초대형 국제행사에 딸 주애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만 12세 어린 소녀의 세계 외교무대 데뷔전이 주는 대외 메시지를 사실상의 '후계자 신고식' 또는 '세자 책봉식'으로 보는 해석까지 나왔다. 주애는 아버지가 중국 공산당 지도부로부터 영접받을 때 바로 뒤에 섰다. 후계자임을 공식화하려는 의도로 분석되는 장면이었다. 선대인 김정일과 김정은도 후계자 내정 이후 중국을 방문해 후계 구도를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주애로 세습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견해도 있다. 너무 어려 당 공식 직함을 받고 우상화 작업을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게 걸림돌이다. 그동안 북한 정세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와 달리 여전히 남성 위주 가부장적 봉건 사고가 지배하는 북에서 여성 지도자의 등장은 어려울 거란 분석도 있다. 조선 왕조의 장자 승계처럼 북에서도 아들 승계 원칙이 깨진 적은 없다. 군부가 어린 여성을 지도자로 인정하지 못할 거란 회의론도 적지 않다. 이런 이유로 주애는 위장용이고 숨겨둔 아들이 돌연 4대 세습을 완성할 거란 관측도 나온다. 3대 세습 때에도 유력 후보는 본처 장남인 정남이었지만, 결국 최종 승자는 꼭꼭 숨겼던 셋째 부인 소생 정은이었다. 한때 정보기관에선 김정은에게 2010년생 장남이 있거나 성별 불상의 셋째가 있다는 첩보를 내놓기도 했다. 김씨 일가 가계도는 구체적이고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워 자녀가 얼마나 더 있는지는 사실 알 수 없다.
다만 여성 지도자 불가설에 맞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당 지도부와 관료 사회 등에 여성이 거의 없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아직도 쓰는 북이지만 몇 년 새 사뭇 달라진 풍경이 보인다. 리설주가 '퍼스트레이디' 이상 역할로 부각되기도 했고, 동생 여정은 대외 선전의 선봉에 서왔다. 외무상인 최선희는 김정은을 밀착 수행하며 최측근처럼 비치는 장면이 자주 보였다. 미디어에서도 과거와 달리 남녀평등을 은연중 강조한다고 한다. 김정은이 가는 곳에는 항상 이들 여성이 눈에 띄었다. 김주애 후계설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이들을 전면에 세운 것이 여성 최고존엄에 거부감이 없도록 사전에 인식을 전환하려는 차원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김정은이 4대 세습에 속도를 내는 모습은 대내외 불안한 시선을 불식하려는 초조함이 반영된 것이란 분석도 있다. 중국 전승절 행사에 처음 참석한 데다 어린 딸까지 데려간 건 핵보유국 지도자로서 다자 무대에 등장하고 후계 구도에도 이상 없음을 과시함으로써 북의 국제적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필사적 시도일 수 있다. 김정은이 최근 몇 년 새 급진적 변화를 시도 중인 점도 같은 맥락에서 볼 여지가 충분하다. 김정은은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전쟁 중인 적대적 교전국 관계로 규정하고 '두 국가론'을 분명히 했다. 일본 식민지 해방도 조부 김일성의 항일 투쟁 대신 소련의 전승 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올해 광복 경축 연설에서도 김일성은 언급되지 않았고 러시아의 공만 기렸다. 이런 행보는 북에서 신과 같은 존재인 '김일성 지우기'이자 조부와 부친의 유훈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어서 정확한 배경과 의도에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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