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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79)모잠비크·남아공 둘다 퍼스트레이디 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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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고웅석 기자 = 모잠비크에서 그라사 마셸을 빼놓고는 교육을 얘기할 수 없다.
그라사 마셸은 1975년 6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모잠비크의 초대 교육부 장관을 맡아 14년간 헌신했다. 그 기간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의 비율은 40%에서 80% 이상으로 늘어났다고 책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는 전한다.
1945년생인 그녀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 당시 저항세력인 '모잠비크해방전선(FRELIMO)'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이 조직을 이끌던 사모라 마셸을 만났다.
사모라 마셸은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몇 달 뒤에 둘은 결혼했고, 그라사 마셸은 교육부 장관이자 영부인이 되었다.
그라사 마셸은 1986년 10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남편 마셸 대통령이 잠비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귀국하던 길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진 것이다.
그녀는 개인적인 슬픔에도 불구하고 1989년까지 교육부 장관직을 계속 수행했다.
홀로 된 그라사 마셸은 1990년 27년간의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넬슨 만델라가 모잠비크를 방문했을 때 그를 처음 만났다. 2년 뒤 그라사 마셸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때 둘은 다시 만났다.

이후 만델라는 1994년 4월 남아공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고, 2년 뒤인 1996년 둘째 부인 위니 여사와 이혼했다. 위니 여사는 1960년대 초부터 만델라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마마 만델라'로 불리며 존경받았으나 여러 가지 부정부패 논란 속에 결혼생활에 파국을 맞은 것이다.
만델라는 1998년 7월 80회 생일에 그라사 마셸을 셋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라사 마셸은 모잠비크에 이어 남아공의 영부인이 됐다.
그녀는 만델라가 2013년 12월 95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을 때 그의 곁을 지켰다. 이후에도 아프리카 어린이와 세계 평화를 위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23년 5월에는 만델라가 창설한 국제원로그룹 '디엘더스' 행사와 관련해 방한하기도 했다.
freemong@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