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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IMF에서 '계엄'이 왜?…한은총재의 씁쓸한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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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가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국제통화기금(IMF) 강당에서 다시 거론된 것은 낯설었지만, 돌이켜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의 IMF 본부에선 '미셸 캉드쉬 특별강연'이 열렸다. IMF는 1997년 '구제금융 사태'라는 이름과 '금 모으기' 운동으로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에 남아 있다.
당시 구제금융을 집행하면서 대규모 기업 구조조정과 감원을 요구한 이가 캉드쉬 총재였다. 이번 특강은 역대 최장수(13년) 총재였던 그를 기념하면서 매년 회원국 중앙은행 총재를 초청, 국제 경제·금융에 대한 견해를 듣는 자리다.
올해 연사로는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가 초빙됐다. IMF는 이 총재가 한은에 부임하기 직전까지 8년간 아시아·태평양국장으로 재직한 친정 같은 곳이다.
사전에 안내된 이 총재의 기조연설 주제는 이 분야의 배경지식이 없다면 알쏭달쏭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통합 정책 프레임워크 이야기: 실효하한금리(Effective Lower Bound) 시대로의 확장'이었다.
약 30분의 강연 도중 이 총재는 "계엄" 얘기를 꺼냈다. 느닷없이 웬 계엄이었을까. 그의 발언은 이랬다.
"예상치 못한 계엄 선포로 한국 경제는 급속히 침체하기 시작했다.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내수, 특히 자영업 매출이 급락했다. 경기만 생각하면 금리를 인하해야 했지만, 한은은 1월 금통위 회의에서 금리를 동결했다.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해외 투자자들의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하면서 원화 가치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하락(달러/원 환율 상승)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중앙은행은 경기가 위축된다고 판단할 때 금리를 내려 시중에 자금을 공급한다. 반대의 경우 금리를 올려 자금을 흡수한다. 경기 과열·침체의 부작용을 막고, 물가와 고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다.
통화정책의 교과서 같은 패턴인데, 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일까. 경제의 통상적 '사이클'이 아닌, 정치적 '돌발변수'로 빚어진 경기 침체였기 때문이라는 게 이 총재의 발언 취지다.

특강에 이어진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와의 대담에서도 계엄은 화제로 다뤄졌다.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이 총재에게 "(어떤 나라는) 인플레이션이 낮아서 금리가 낮고", "(다른 어떤 나라는) 인플레이션이 높아서 금리가 높은데", "금리가 낮고 인플레이션이 낮은 당신네는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이 총재는 "한국은 아직 저물가·저성장 환경은 아니"라며 "그건 일본 사례"라고 반박했다. 그는 '아직'이라는 말에 힘을 줬다.
이어진 말은 "한국의 상반기 성장률을 거의 0%로 만든 올해 정치적인 혼란 탓에" 물가상승률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는 설명이었다. 계엄 사태의 여파로 한국은 올해 1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고, 경기가 침체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물가상승률도 낮았다는 것이다.
그는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어제 한 연설을 보면서 우리 (한국의) 인플레이션이 2%라는 점이 아주 기뻤다"며 "(중앙은행 총재로서) 나의 책무는 달성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의 경우 물가상승률이 목표치보다 높은데도 금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던 반면,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는 농담조였다.
좌중 사이에선 웃음이 나왔지만, 몇 달 전까지 한국에서 정치 분야를 담당했던 기자로선 씁쓸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미친 경제적 파장을 생생히 지켜봤기 때문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경기 침체로 이어졌고, 환율은 급등했으며, 사람들이 지갑을 열지 않으니 물가는 안정될 수밖에 없었다.
더 걱정되는 건 일본처럼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 총재가 반박하면서도 덧붙인 '아직'이라는 표현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낮추고, 정부는 곳간을 푼다. 시중에 돈이 돌면 경제가 활성화하기 때문인데, 앞으로도 경기 침체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비관론이 팽배하면 백약이 무효일 수 있다. 그게 일본이 겪었던 유동성 함정이다. 이 총재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미래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도 이처럼 금리를 더 내려봤자 효과가 없는 '실효하한금리'(ELB)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내용의 특강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ELB 위험은 인구 고령화, 저출산 등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사후적 재정·통화정책 대응보다 사전에 구조개혁을 통해 ELB 상황 자체를 예방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법이다."

zheng@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