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박상경 기자] '역사적 승리.'
닛칸스포츠 등 일본 현지 매체들이 15일 '사무라이 블루(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애칭)'의 브라질전 승리 소식을 전하며 내건 헤드라인이다. 13차례 A매치에서 2무11패로 절대 열세를 보였던 일본이 브라질을 상대로 두 골차를 뒤집고 3대2 역전승을 거둔 환희가 가시지 않고 있다.
결과도 결과지만, 내용이 눈부셨다. 전반에 두 골을 내주며 끌려간 결과는 한국과 같았지만, 후반 초반 실수로 두 골을 더 내주고 무너졌던 한국과 달리 일본은 후반 초반부터 전술을 바꿔 3골을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힘을 선보였다. 두 골을 내준 뒤 행운의 추격골을 얻은 시점에서 에이스 구보 다케후사(레알 소시에다드)를 빼고 동점과 역전 발판을 만든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의 용병술, 브라질을 상대로 승부를 주도한 선수들의 자신감, 집중력은 패한 브라질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 축구매체 풋볼존은 이날 경기를 지켜본 영국 출신 기자 멘트를 인용해 '더 이상 약체 입장에서 월드컵에 임할 필요가 없다'고 평할 정도다. 축구 광팬으로 알려진 탤런트 가쓰무라 마사노부는 브라질전 이튿날 자신의 SNS를 통해 '환희가 가시지 않는다. 살아 생전에 일본의 월드컵 우승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도 들린다. 제발 꿈이 아니길'이라고 기쁨을 나타내기도 했다.
1993년 J리그 출범 당시 일본이 이른바 '백년대계'의 목표 중 하나로 '2050년 월드컵 우승'을 내걸 때만 해도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당시만 해도 월드컵 무대조차 밟지 못했던 일본이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제 일본의 '월드컵 우승 목표'는 조금씩 진지한 화두가 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선수 뎁스다. 현재 유럽 내 일본 선수는 100명이 넘는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선수 중 '유럽 빅리그 주전급'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카타 히데토시(AS로마), 혼다 게이스케(AC밀란) 정도가 그나마 두각을 나타낸 선수였다. 대부분 선수 이적료는 헐값이었고, 주전 자리를 잡아도 유럽 군소리그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구보 뿐만 아니라 엔도 와타루(리버풀), 가마다 다이치(크리스탈팰리스), 미토마 가오루(브라이턴), 스즈키 자이온(파르마), 도안 리츠(프랑크푸르트), 미나미노 다쿠미(AS모나코) 등 소위 '유럽 5대리그'에서 핵심 선수로 활약하는 비중이 크게 늘었다. 이들 대부분이 빅리그-빅클럽 대신 군소리그 주전으로 출발해 실력을 증명하고 빅클럽으로 이적한 바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이적 제의에 "주전으로 뛰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며 벨기에 신트 트라위던행을 택했던 스즈키가 대표적 케이스다. 여전히 일본 선수 중 한국처럼 손흥민(LA FC), 이강인(파리 생제르맹),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같은 월드클래스 선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 일본 대표팀에 선발되기 위해선 유럽에서도 단순 주전이 아니라 핵심 선수 정도로 뛰어야 선발 가능성이 생길 정도로 선수 뎁스가 두터워졌다. 워낙 선수 풀이 넓다 보니 모리야스 감독이 독일 뒤셀도르프의 일본축구협회(JFA) 유럽출장소에 상주하며 선수들을 체크하겠다고 밝혔다가 J리그 팀들의 반발로 물러섰을 정도다. 경쟁력 있는 선수를 골라 쓸 수 있는 환경이 완벽하게 구축되면서 자연스럽게 대표팀 경쟁력도 크게 올라갔다. 풍부한 뎁스를 바탕으로 나선 2022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스페인, 독일에 잇달아 2대1 역전승을 거두며 자신감까지 얻고 완벽한 시너지가 일어났다. 이후 독일 원정 친선경기에서 4대1로 이긴 일본은 안방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두 골차를 뒤집고 승리를 거두기에 이르렀다.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살린 정책의 승리이기도 하다.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출신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 체제로 나섰다가 실패를 맛본 일본은 이후 하비에르 아기레(독일),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을 앉혔으나 마찰의 연속이었다. 결국 러시아월드컵 개막 한 달전 할릴호지치 감독과 결별한 일본은 니시노 아키라 감독 체제로 전환해 16강에 진출했고, 이후 모리야스 감독의 장기 집권 체제를 이어가고 있다. 할릴호지치 감독과의 갈등과 러시아월드컵 16강행 과정에서 해외 지도자 선임을 통한 선진 축구 이식도 중요하지만, 자국 선수 특징과 일본 축구 특성을 가장 잘 아는 지도자로 대표팀을 꾸려 효과를 극대화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국내 지도자 선회에는 대표팀 외국인 사령탑 시절에도 코치진을 자국 출신 지도자로 꾸준히 채워오며 '선진 축구 흡수'를 추구했던 기반도 바탕이 됐다. 니시노 감독과 모리야스 감독 모두 J리그와 연령별 대표팀 지도 코스를 밟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케이스다. 모리야스 감독 취임 후 일본은 성인 대표팀 전략-전술에 맞춰 연령별 대표팀이 선수를 선발하고 육성하는 일원화 체계가 본격화 됐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성장한 연령별 대표가 J리그→유럽 군소리그→빅리그 진출 코스를 밟고, 2020년대 중반에 이른 현재 성인 대표팀 경쟁력을 몰라보게 달라지게 만들었다.
일본도 발전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모리야스 감독 체제, 협회 행정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궁극적 목표인 '일본 축구 베이스를 통한 대표팀 경쟁력 강화'라는 장기적 목표에 초점을 둔 결과는 '월드컵 우승 목표'가 더 이상 허언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힘을 만들었다. 여러모로 한국 축구에 시사하는 바가 큰 일본 축구의 현주소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