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후유증, 포퓰리즘의 무기로…동독지역 '2등 시민론' 자극
'공동의 기억' 찾기…정치·경제적 위기 극복할 수 있을까
베를린에서 한독통일자문위원회…통일 경험과 교훈 공유
[※편집자 주: 지속가능한(sustainable) 사회를 위한 이야기들을 담아낸 '플랫폼S'입니다.]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기자 = 지난 1991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한 부유층 주택가에서 총성 3발이 울렸다. 자신의 집 서재에 있던 신탁청장 데틀레프-가르스텐 로베더가 창문을 뚫고 들어온 총알에 숨졌다.
신탁청(Treuhandanstalt)은 옛 동독 지역 기업 8천500개의 민영화와 구조조정을 전담한 기관이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아래서 경쟁력이 낙제점에 가까운 기업들을 청산했고, 이 결과로 수백만 명의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사건 현장에는 독일 극좌 테러단체 적군파(RAF)의 소행임을 주장하는 문서가 남겨졌으나, 수사당국은 끝내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 채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퍼펙트 크라임: 로베더 암살사건'(2020년 作)은 당시 사건이 배후를 추적하면서 신탁청으로 인한 동독지역의 혼란상과 주민들의 격앙된 반응을 조명했다.
적군파 용의자는 은거지가 드러난 뒤 경찰과 총격전 끝에 사망했으나, 사망 경위조차 불분명했다. 게다가 이를 규명할 증거도 조사 중 사라지면서 은폐 의혹이 제기됐다. 신탁청장 살인 사건의 배후에 어떤 세력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의구심이 짙게 드리워졌다.
옛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가 동독지역 기업들로부터 얻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반(反)신탁청 세력을 궁지에 몰기 위해 서독 주류 세력이 벌인 암살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기도 했다.
암살 사건 이후 동독 경제 재편의 방향성이 다소 조정됐다. 살해당한 로베더 청장은 기업 구조조정에 초점을 뒀다면, 후임 청장은 기업 매각에 집중하면서 속도를 높였다.
범행 배후가 누구였든, 동독지역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고 통일 독일 정부의 '칼잡이'었던 신탁청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이 투영된 사건이었다.
신탁청은 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경제적 갈등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지는 갈등의 근원이기도 하다. 극우 성향 정치인들에게 옛 동독지역 시민들을 자극·선동하는 주요 소재로 활용됐다. 독일 사회가 35년 전 달성한 통일의 후유증이 현재 독일 사회에 다시 강력한 도전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 민영화 담당한 신탁청…'대량해고' 가족 기억으로 대물림
신탁청은 통일 직후 한동안 좌파당이 제기해온 정치 이슈였으나, 몇 년 전부터는 극우 성향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핵심 아젠다로 바뀌었다. AfD는 '체제에 버림받은 동독인'이라는 감정을 건드리는 재프레이밍을 통해 주류 정치권을 공격했다.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신탁청의 역할을 두고 '동독의 매각', '동독인들의 평생 성과를 약탈', '책임지지 않는 정치 엘리트'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독지역의 경제 문제를 부각했다.
독일 통일 초기 신탁청을 통해 상당수의 기업이 서독지역과 해외 기업에 매각돼 대량 해고가 진행되면서 완전고용이었던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통일 1∼2년 만에 10%대로 치솟았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결핍은 있었지만 실업을 겪지 않았던 동독 주민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당시 해고를 경험한 당사자뿐 아니라, 지금은 어엿한 유권자로 성장한 어린 자녀들에게도 가정에 불어닥친 경제적 어려움과 좌절감이 기억 속에 또렷이 새겨졌다.
◇ "통일 당시 최선의 조치" vs "후유증 과소평가"
신탁청의 활동 결과를 바라보는 기성 사회의 시각에는 차이가 있다. 이는 현실 독일 정치·사회적 난제를 풀어가는 방법론의 차이로 이어진다. 지난 17~18일 베를린에서 열린 한독통일자문위원회에서 독일 측 위원들 사이에서 이런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한독통일자문위원회는 한국 통일부와 독일 연방재무부 간 차관급 민관 회의체로, 통일 관련 양국 상황을 주제로 연례 회의를 열어왔다.
통일 당시 헬무트 콜 총리 옆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요하네스 루데비히 전 신연방주특임관은 "당시 서독의 재정 상황을 봤을 때 통일은 힘든 큰 도전이었고, 모든 일을 다 좋게 이룰 수는 없었다"며 "극우 성향 정당이 영향력을 넓히는 것은 동독 지역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일어나는 포퓰리즘적 경향"이라고 항변했다.
통일 당시 주요 경제 플레이어 중 한 명인 칼-하인츠 파케 프리드리히 나우만재단 이사장은 "동독 기업들의 경쟁력 등을 감안할 때 당시 조치들이 없었다면 동독 지역의 심각한 공동화를 낳았을 것"이라며 "현재 미국과 프랑스 등의 변화를 볼 때 극우화는 글로벌 산업 사회 속에서 생기는 경향"이라고 진단했다.
파케 이사장은 통일 당시 연립정부에 소수파로 참여한 자유주의 성향의 자유민주당 소속이다.
이들은 소속 정당에 이념적 차이가 있지만 서독에 뿌리를 둔 주류 정당 출신이자 정치 원로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은정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 교수는 "독일 통일 산증인들의 기억과 현재 입장은 당시 정치 활동 배경에 따르는 경향"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동독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풀어가기 위해 신탁청을 새롭게 조명하는 이들은 통일 과정의 주역들과 입장을 달리했다. 기존 주류 사회의 해석으로는 현재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입장이다.
마르쿠스 베이크 케임브리지대 사학부 교수는 "대량 실업이 동독 사회에 가한 충격과 이로 인한 장기적 물질적·정신적 결과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며 "서독의 다수 사회에서는 불만을 가진 동독 주민들의 태도가 '배은망덕' 또는 '적응 의지 부족'으로 읽혔다"고 지적했다.
그는 "동독 주민들은 줄곧 자신을 2등 시민이나 이방인으로 느껴왔고, 이 정서를 현장과 온라인 공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포착한 게 AfD"라며 "거시적 지표와 동원된 재정에만 의존하는 기술관료적 해법은 심각한 사회적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 온라인상에서 동독을 미화하거나 '2등 시민론'을 부추기는 콘텐츠에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와 관련해 카민스키 연방독재청산재단 사무총장은 "나치 시대와 달리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서는 정치적·사회적 합의가 결여돼 있다"고 진단했다.
시리아 내전 등의 영향으로 2010년 중반부터 매년 수십만 명씩 독일로 몰려든 난민은 동독 주민의 불만을 키우는 촉진제가 됐다. 이봉기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독일 기성 정치권은 '우리는 해낼 수 있다'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동독 주민들은 '우리부터 통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설명했다.
◇ '민주화 운동에 의한 통일'…동독 주민 자긍심 찾기
통일의 나이테가 굵어질수록 되려 커지는 후유증이 현실 사회의 위기로 부상하자, 독일 기성 사회가 내놓은 기본 처방전은 '동독의 기억' 찾기다.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이 아니라 동독 주민들의 민주화 운동이 통일의 문을 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동독 주민들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작업이다.
AfD가 약진하기 시작한 이후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 등 유력 정치인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동독 지역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자긍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해왔으나, 아직 그 효과는 정치적 결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독일 정부는 시민사회에서 '공동의 기억' 형성을 위한 물리적 기관도 준비 중이다. 2030년 개관을 목표로 마련 중인 '독일 통일과 유럽 전환을 위한 미래센터'(이하 미래센터)는 시민들이 대화와 논쟁을 통해 경험을 공유하고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공간이다.
한독통일자문위원회의 독일 측 대표인 엘리자베트 카이저 연방재무부 차관(하원의원)은 "올해 설계안이 마련됐고 운영할 핵심 인사들도 채용됐다"며 "그곳에서 많은 프로젝트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측 참석자들은 기존 사회에 자리 잡은 '정치교육'도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식 정치교육은 1970년대 진영 간 대립이 극심했던 서독 사회가 주입식 교육을 금지하고 견해차를 논쟁을 통해 풀어가는 점을 교육의 기초로 삼은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독일 식 정치교육은 한국에선 '민주시민교육'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해 한국 측 대표로 자문위원회에 참석한 김병대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은 "이재명 정부는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서 사회적 대화를 강조하고 있다"며 "독일 정치교육을 벤치마킹해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베이크 교수는 한국 측에 "독일 통일이 가져다준 충격을 감안해보면 반드시 '아래로부터'의 폭넓은 동행이 필요하다"며 "필요한 것은 통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 주저앉을까, 다시 도약할까…기로에 선 독일
그렇다면 통일 35주년을 맞이한 독일이 통일 후유증과 연관된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기성 정치의 위기는 경제 위기와 맞물렸다. AfD가 약진하는 시기에 독일 경제는 침체 일로를 겪었다.
특히 팬데믹 이후 경기 부진이 이어지는 데다 최근 2년간 역성장했다.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 속에서 독일이 자랑하던 제조업은 침체의 늪에 빠지는 양상이다. 애초 디지털 전환도 더뎠는데, AI 전환은 더욱 헤매는 모습이다.
세대 간, 지역 간 경제적 격차가 커지는 데다 인플레이션으로 체감 경기가 악화하는 가운데, 자극적인 정치 구호는 주류 사회에 불편했던 시민의 감정을 도발했다.
지난 3월에는 기본법(헌법)을 개정하며 국방과 사회 인프라 등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기로 했지만, 사용처를 놓고 논란이 커지는 등 재정 투입 효과에 의문부호가 따른다.
독일이 자랑하던 정치교육도 순탄치만은 않다. 온라인상에서 허위 정보가 넘실대는 가운데 교육 기능이 악화했다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독일 주류 정치권이 미래센터 건립을 밀어붙이는 것은 그만큼 위기감이 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독일 사회는 한국 사회와 분단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고, 전후 잿더미 속에서 경제 기적을 일궈낸 공통점도 안고 있다. 독일이 먼저 경험한 일이 있다. 통일을 이뤘고 저출생·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가운데 지난 10년간 수백만 명의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했지만, 사회적 통합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안게 됐다.
독일은 유럽연합(EU)에서 사실상 최대 리더 국가다. 이대로 쇠락기를 맞을지, 아니면 효과적으로 응전해나갈지는 국제 질서에 미치는 영향 측면에서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안정적인 정치구조를 자랑해온 독일에 포퓰리즘 정권이 들어설 경우, 유럽의 어느 국가보다 그 파장은 클 수 있다. 가뜩이나 러시아를 의식해 재무장을 추진하기 시작한 터다.
통일 당시 동독 지역의 주요 정치인이던 한스-요아힘 해커 전 사회민주당 의원은 한독통일자문위원회가 끝난 뒤 필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며 "통일을 이루면 평화가 올 줄 알았는데 위기가 계속된다"며 "통일도, 그 이후 도전에 대한 대응도 숙명"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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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