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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의 타지 생활 뒤 돌아온 국내 무대. 이명환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NC에서 뼈를 묻겠다"고 했다.
NC 4번타자 이명환(27)은 애리조나에서 치른 KIA 한화 넥센 두산과의 연습경기에서 17타수 6안타 2타점을 기록했다. 홈런은 없었지만 2루타 2개, 3루타 1개를 날렸다. 매경기 팀 타순이 바뀌었지만 이명환의 자리만큼은 언제나 '4번'이었다.
이명환은 '방출선수'였다. 한양대를 졸업한 2008년, 프로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신고선수로 KIA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2군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건장한 신체조건(1m88/94㎏)을 바탕으로 장타력을 갖춘 외야수로 주목받았다. 흔히들 말하는 2군 거포였지만, 2년차였던 2009년에는 퓨처스 올스타전에서 홈런포를 터트리며 생애 첫 MVP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이명환은 2009시즌 중 '정식선수'이야기를 들었다. 무릎에 통증이 있었지만 오로지 정식선수 계약이라는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참고 달렸다. 퓨처스 올스타전에서 MVP 패널을 들어올릴 때도 통증이 멈추지 않았다.
무릎 인대 파열이었다. MVP의 영예를 안은 순간, 기나긴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이명환은 "당시 다잡은 기회라서 정말 놓칠 수가 없었다. 올스타전에서 상을 받고 곧바로 병원에 갔는데 무릎 인대가 끊어졌다고 했다. 그래도 구단과 이야기가 오간 게 있으니 정식선수를 기대하고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수술 후 기나긴 재활. 처지가 달라져서일까. 정식선수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시들해져 갔다. 결국 2010년에도 신고선수 신분에는 변함이 없었고, 이명환은 그렇게 KIA를 나왔다. 야구를 멈출 수는 없었다. 평소 일본야구에 대한 동경이 있던 터라 '유학차'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야구를 배우기 위해 시작한 일본 독립리그 생활은 고독했다. 말 하나 통하지 않는 동료들과의 생활. 게다가 월급은 야구용품 구입과 생활비로 쓰고 나면 남는 것도 없었다. 그것조차 빠듯했다. 이명환은 "초반에는 정말 방에 틀어박혀 일본어 공부만 했다. 돈도 문제였고, 언어부터 해결해야 했다"며 "6개월이 지나니 일본어가 익숙해졌다. 팀 생활도 편해졌다. 성적도 그 이후부터 좋아진 것 같다"며 미소지었다.
이명환은 독립리그에서 그동안 약했던 '밀어치는 법'을 터득했다. 힘이 좋아 당겨치는 데는 워낙 일가견이 있던 상황. 일본 투수들의 바깥쪽 공에 익숙해져서인지 다양한 코스로 타구를 보낼 줄 알게 됐다.
이명환은 NC 스카우트진의 설득에 지난해 11월 강진캠프 현장을 찾았다. 김경문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인사를 나눴다. 당초 테스트를 받으려 했지만, 몸상태가 좋지 않아 다음에 하자고 미룬 상황이었다. 이명환은 운동복을 입고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하지만 김 감독이 갑자기 타석에 나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배트를 쥐고 나섰다. 곧바로 1타점 적시타를 날렸다. 처음부터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이명환은 NC와의 입단 협상 일화도 털어놓았다. 강진캠프를 하루 들른 이후 협상이 시작됐다. 금액 문제로 다소 지지부진해진 상황. 이명환은 어느날 밥을 먹다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경문 감독의 전화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명환아, 같이 뛰어보고 싶다, 함께 하자." 이명환은 곧장 계약서에 사인했다. 계약금 4000만원에 연봉은 최저인 2400만원이었다.
제주캠프가 끝나기 일주일 전 지각합류했지만 그때부터 이명환은 4번타자였다. 이명환은 "감독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4번타자가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NC가 날 영입한 이유를 증명해보이고 싶다"며 웃었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