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S] 2012 이지영에게서 2007 김광현이 보이는 까닭

최종수정 2012-10-25 10:44

24일 오후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2012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1차전 삼성과 SK의 경기가 열렸다. 7회말 1사 1루서 삼성 안지만이 포수 이지영이 SK 조인성의 파울 플라이를 호수비로 잡아내자 환하게 웃고 있다.
대구=김경민 기자 kyungmin@sportschosun.com / 2012.10.24.

'데자부(deja vu)'.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마치 전에도 보거나 경험한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다. '기시감'이라고도 한다. 누구나 한 두번쯤은 이런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낯선 장소에 갔거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꼭 전에 와봤거나 비슷한 대화를 해본 것 같은 느낌. 그게 바로 데자부다.

2012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데자부'를 느꼈다. 엄밀히 따지면 데자부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심리적 느낌에 그칠 뿐이지만, 이번 경우는 실질적으로 시간과 상황을 초월해 비슷한 두 사례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2012년 한국시리즈의 삼성 류중일 감독이 선택한 깜짝 카드, '선발포수 이지영'을 보니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SK 김성근 감독이 '선발투수 김광현'을 내세웠을 때가 떠오른다. 한 번의 경기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내다본 감독의 결단과 그에 부응해 큰 성장을 이뤄낸 선수, 바로 이 절묘한 조합이 닮았다.

스케일이 달랐던 '야통'의 결단

24일 대구 구장에서 2012 한국시리즈 1차전을 몇 시간 앞둔 시점. 류 감독은 덕아웃에 모인 취재진에게 "오늘 선발포수는 이지영이다"라고 선언했다. 취재진이 잠시 술렁였다. 당연한 반응이다. 대부분의 취재진은 한국시리즈 1차전과 같은 중요한 경기라면 당연히 베테랑이자 이제는 삼성의 상징과 같은 주전포수 진갑용을 낼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예상을 빗겨간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 류 감독은 "진갑용이 왼쪽 종아리에 통증을 호소해서 (1차전 출전대신)치료에 전념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성의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는 포수가 3명이나 된다. 38세의 베테랑 진갑용이 상태가 안좋을 때를 대비한 선택으로 이정식(31)과 이지영(26)이 준비하고 있다. 이 경우 '차선책'은 이정식이 유력해보였다.

하지만 류 감독은 이지영을 선택했다. 류 감독은 이 선택에 대해 "모험이다"라고 선뜻 인정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모험이긴 해도 이지영에게는 큰 기회가 될 것이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어 큰 무대가 부담스러울 수는 있지만, 이렇게 큰 경기를 통해 성장하는 선수도 많이 봤다. 그런 기회를 주려고 했다."

최종 우승이 걸린 한국시리즈라는 커다란 무대에서 류 감독은 두 마리 토끼를 노린 것이다. 팀의 승리는 기본이었고, 거기에 덧붙여 팀을 이끌어갈 차세대 주전포수가 한 단계 레벨업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전체를 보고,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류 감독의 큰 스케일을 엿볼 수 있는 선택이다.


결과적으로 류 감독의 이 결단은 커다란 효과를 봤다. 이지영은 선발 포수로 나서 7회말 대주자 강명구로 교체되기 전까지 무난하게 경기를 이끌었다. 이날 선발 윤성환의 전담포수로 올 시즌 활약한 덕분도 있지만, 큰 경기에서 흔들리지 않는 배짱이 돋보였다. 특히 1회초 SK 박재상의 도루를 저지한 것은 이날 경기 초반의 흐름을 삼성으로 이끈 호수비였다.


SK 김광현은 2007년 10월 26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07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깜짝 선발로 등판해 7⅓이닝 1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를 발판삼아 SK는 역전 우승을 했고, 김광현은 한국을 대표하는 좌완투수로 성정할 수 있었다. 당시 6회말 1사에서 김현수가 친 내야 뜬공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치는 김광현. 잠실=전준엽 기자 noodle@sportschosun.com
'2012 KS 이지영'과 '2007 KS 김광현'이 닮은 이유

그런데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다.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SK를 이끌던 김성근 감독도 비슷한 선택을 했다. 그 대상은 현재 SK의 에이스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좌완 투수인 김광현이었다. 상황은 조금 달랐다. 류 감독은 1차전에 이런 결단을 보여줬지만, 김 감독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4차전에서 '김광현 카드'를 뽑아들었다.

당시 SK는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1, 2차전에서 모두 패해 큰 위기에 빠져 있었다. 잠실로 장소를 이동해 치른 3차전에서 겨우 이겼지만, 시리즈 전적은 여전히 1승2패로 불리했다. 그런 상황에서 치른 4차전. 김 감독은 선발로 김광현을 투입했다. 이 또한 '모험'에 가까웠다. 그해 신인 김광현은 정규시즌에서 기대만큼의 성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20경기에 나왔지만, 3승7패에 평균자책점 3.62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4차전 무대에서 김광현은 비로서 날개를 활짝 펴고 크게 비상했다. 선발로 나와 7⅓이닝을 단 1안타만 내주고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승리투수가 됐다. 결국 SK는 이 승리를 발판삼아 역전 우승을 거뒀다.

4차전 경기 종료 후 김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SK에 큰 투수가 하나 탄생했다." 한국시리즈라는 큰 무대에 김광현을 낸 것은 모험에 가까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를 계기로 김광현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류 감독이 2012 한국시리즈 1차전의 선발포수로 이지영을 내면서 언급했던 "큰 경기를 통해 성장하는 선수"의 사례 가운데에는 2007 한국시리즈에서의 김광현도 포함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당장의 승패도 중요하지만, 팀을 지속적으로 강하게 만들 선수의 발굴과 육성도 큰 과제다. 2012년의 '야통' 류중일 감독과 2007년의 '야신' 김성근 감독은 이런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진한 '명장'의 향기가 느껴진다.


대구=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

Copyright (c) 스포츠조선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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